EP·80
‘뭐야·’
새하얗게 반짝이는 사검 속 엘라는 문득 푸른 실이 눈에 띄었다·
거슬리는 한 가닥이다·
새하얀 털 옷위에 떨어진 푸른 실오라기 하나· 그처럼 눈에는 띄어도 별 것 아닌 무언가·
그러나 그 수가 갑자기 불어난다·
엘라가 사검을 펼쳐냈던 것처럼 점차 수를 불린 푸른 실이 허공에서 경합하기 시작했다·
뒤엉킨다·
더없이 날카롭게 움직이는 엘라의 하얀 사검을 플란의 푸른 실들이 훌륭히 방어하기 시작했다·
‘···검?’
그럴 리는 없다·
마법사가 검을 다룬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사검을 활용할 줄 안다는 것은 더더욱 생소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플란은 분명 사검의 형태를 띤 푸른 실을 다뤄내고 있었다·
어쩌면 엘라의 것보다도 빠르고 날카롭게·
“건방지게···!”
너무나도 건방지다·
마법을 활용해서 사검의 형태를 구현해냈다면 그것 정도는 납득해줄 수 있다·
하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엘라의 새하얀 사검이 푸른 실에 밀려난다는 점이었다·
‘왜·’
도대체 왜·
천라지망·
네 남매의 위상을 지금의 것으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엘라가 네 남매의 첫째로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기술·
새하얀 사검 한 가닥 한 가닥에 엘라의 혼이 담겨있다· 많은 이들을 공포에 떨게하고 또 무릎 꿇리기 위해서 얼마나 정진해왔던가·
하나 둘 쌓인 사검의 수는 무려 수백 자루에 이른다· 그러니 1학년에게 마법사에게 패배하는 일 따위는 상상조차 한 적 없었다·
그러나·
벌어지는 현실이 이상하다·
엘라의 새하얀 실은 원단에 불과하다는 듯 푸른 실이 태연하게 그 위를 수놓았다·
“이럴 수는····”
엘라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터져나온 피 맛이 비릿하다·
본인조차 만족했을 정도로 완벽하게 펼쳐낸 기술이다· 그러나 어째서 상대방의 평정조차 깰 수 없단 말인가·
묶여서 고정되고 완벽히 막히고 승리가 멀어진다·
“왜····”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의심조차 않았던 전제· ‘마법사를 상대로는 패배하지 않는다·’가 지금 그녀의 코앞에서 박살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엘라가 다시 한 번 검을 고쳐쥔다·
이번에는 사검의 수를 무려 두 배로 늘렸다·
한편 플란은 조용히 발현에 집중한다·
마나의 총량을 감안하여 무수히 많은 가닥을 뽑아내지는 못한다만 제대로 된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조화와 생화·’
조화(造花)는 결국 장식일 뿐이다·
살아있는 꽃을 모방하여 생성된 불쌍한 모조품 보는 이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가여운 무언가에 불과하다·
많은 이들이 마법을 조화라 오해한다·
심지어 마법사조차 그리 생각하기도 한다·
기적을 현실처럼 여기게 하는 달콤한 거짓말· 그 정도에 불과한 힘·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의 수는 상당하다· 어딜가나 그러했다·
그러나 틀렸다·
상상을 도식화하는 술식·
그것을 설계로 옮기는 회로·
설계를 현실로 만들어내는 배합·
일련의 과정 곳곳에 생생한 향이 담겨있다·
모조품 따위로는 결코 낼 수 없는 향 그 향의 이름이야말로 근본이다·
요리의 끝에는 진미가 있고 제련의 끝에는 명검이 벼려질 것이다· 공예의 끝에서는 불멸의 예술을 남겠지·
인간은 그것을 ‘기적에 가깝다’라 칭한다·
그렇다면 마법도 그러한가·
마법이라는 학문 역시 극에 달할 수록 기적의 경지에 가까워지는 분야일 뿐인가·
‘아니·’
바로 그 점이 틀렸다는 것이다·
대마법사의 경지 메르헨 플란이 그 위치에 올라서면서 느꼈던 감상은 길지 않다·
마법은 거짓을 달콤하게 속삭이는 환상 따위가 아니다· 그 하나를 뼈에 사무치게 알았다·
마법 그리고 기적·
이 두 개는 같은 뜻을 지닌 단어다·
기적을 흉내내려 할 필요가 기적을 불러일으키려 할 필요가 기적에 가까워지려 애 쓸 필요가 없다·
“마법·”
···이 현상은 그 자체로 기적이니까·
불가능을 이루어내겠다는 마음이 피워낸 결실· 기적이 현실임을 ‘증명’해내는 것이 마법의 본질이다·
화려함 경이로움 우아함···· 이 모든 것들은 마법이 자연스레 풍기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부산물에 집착하지 않는다·
근본을 갖춘다면 아무리 단순한 마법이더라도 그윽한 향이 주변 일대를 뒤덮을 테니·
근원을 알지못한 채 활용한다면 잘 깎인 모조품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마치 눈앞의 엘라처럼·
아무리 화려해져도 강해져도· 근본이라 칭할만한 향취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다·
플란은 문득 옆쪽을 살폈다·
멍해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대표들의 모습이 보였다·
‘직접 보도록·’
지금부터 보일 것은 마법의 근본·
생화의 향취를 즐길 줄 아는 이는 더이상 조화를 찾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 근본을 느낀다면 마법 학부 대표들도 더이상 조급해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지금은 고유 능력에 꺾일지언정 결코 근본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게 될 터·
몸이 바뀌어도 심지어 세상까지 바뀌어도·
마법의 근본은 불변한 요소다·
이것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를 보고 감화받을 수 있는 마법사가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하는 한·
마법사는 어떤 재해 앞에서도 굽히지 않을 것이며 마법은 기꺼이 그를 위한 도구가 될 것이다·
또한 네 남매에게도 가르침을 주려 한다·
그들이 하루 아침에 얻어낸 축복은 사실 저주임을 검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없게 만들었던 족쇄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할 것이다·
플란의 실이 화려하게 엘라의 사검을 다루었다· 이내 허공에서 십자수가 수놓아지기 시작한다·
선이 하나· 둘· 끝도 없이 늘어난다·
이내 그려지는 것은 푸른 색의 육망성·
결코 역전될 수 없기에 흐려지지 않는 힘· 지혜를 상징하는 기호· 이 단순한 도형 안에도 마법의 근본은 존재한다·
플란의 시야에 베키 트릭시 루이스의 모습이 보였다· 이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는 그들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앞으로 너희가 걸어야 할 길이다·’
플란이 인정한 원석·
그들 또한 마법사니까 언젠가는 닿아야 할 지점이다·
“너····”
엘라의 입이 감탄으로 벌어졌다·
적을 보며 감탄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불가항력이다·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이해를 건너뛰어 본능에 맞닿는다·
엘라의 감은 눈· 검은 시야·
어둠 뿐이던 그곳에 푸른 실의 궤적이 전부 느껴진다· 온갖 마법진이 푸르게 수놓아진다·
선과 원으로만 살펴도 수백을 넘어서는 문양인지 도형인지 무늬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하· 어렴풋이 아름답다고만 느껴지는 것들·
엘라는 술식을 읽지 못한다·
그러한 그녀조차도 갈피를 잃을 것 같고 파헤쳐보기에는 엄두조차 나지 않는 분량·
그럼에도 느껴진다·
‘무수하다’라고 칭할 만한 모든 점 선 원···· 그 모든 것이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아름다워·’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저 어느샌가 손에 힘을 풀어 어두운 시야에 그려지는 푸른 문양들을 감상했다·
다급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되레 차분해진다·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빨려가는 듯 했다·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런건···· 어떻게 해야····’
-자칫하면 질 거요·
문득 아이반의 말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엘라의 사검에 부족한 건 무엇이었을지 어떤 방향으로 걸어야 도달할 수 있을지 무엇을 훈련해야 닿을 수 있었고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수없이 많은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입을 열어 질문할 수 없었다· 또한 플란의 실이 그녀에게 대답해주는 법도 없었다·
그저 유려하게 예술을 펼치듯·
엘라의 사검에 존재하는 빈틈을 전부 채워주겠다는 것처럼 푸르게 물들여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피날레·
뚜두둑─!
실 전체가 한 번에 끊어져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플란은 그곳에 불씨 하나를 던졌다·
화랑이 곧바로 그것을 쫓아 뛰어오르고·
─시간 경과 5단계가 종료됩니다·
커튼콜·
허공에는 아름다운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반짝이는 실들을 몸에 온통 뒤집어 쓴 채 화염을 뿜어내는 화랑은 그 자체로 축제의 성화·
화랑의 육신이 허공에서 신기루처럼 흩어지고 남는 것은 짙게 가라앉는 침묵 뿐이다·
그 고요 속에서 안내 방송은 이어진다·
─점수를 중간 집계하여 발표합니다·
─마법 학부 300점·
─기사 학부 240점·
지금껏 동일했던 양 학부의 점수는 5단계를 기점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플란이 조용히 읊조렸다·
“마음에 드나· 엘라·”
우위에 선 것은 네 남매가 아닌 마법 학부다·
─양 학부 대표들의 기량을 고려합니다·
─5분 뒤 10단계가 시작됩니다·
시간이 정지한 듯한 그 순간·
엘라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앞으로는 다시 5시 5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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