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1
─10단계가 시작됩니다·
휴식으로 주어진 5분이 전부 경과하고 10단계가 시작되는 그 순간까지도 온통 정적이었다·
그 침묵을 내가 깼다·
“10단계에서 나는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는다·”
품속에서 채점지를 꺼내어 그것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너희들의 감점 횟수가 총합 100번을 넘는 순간 우리 조는 기권하는 것으로 하겠다· 그리고·”
요는 간단하다·
본선에 진출하고 싶다면 감점을 피하면서 10단계를 마무리하라는 의미였다·
“너희는 지금까지 총 99번 감점되었다·”
그 사실을 고지한 순간·
“····”
불현듯 엘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머지 셋····”
“응?”
“나머지 셋을 노려·”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심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카셀이 되물었다·
“프 플란은?”
“플란은 무시해· 그냥 없다고 생각하고 나머지 세 명만을 노려·”
“쟤를 무시하라고···?”
“무시하라면 무시해─! 어차피 참여도 안 한 다잖아!”
엘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떨리는 그녀의 몸은 분노한 것 같기도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했다·
“플란· 플란···· 플란은 신경 쓰지 마· 절대로 플란은 신경 쓰지 마····”
결국 엘라를 선두로 하여 이고르와 카셀이 나를 제외한 마법사들에게 달려들었다·
“흠·”
시간을 살폈다·
10단계 마수는 환상수(幻想樹)로 고정이지만 등장이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공개된 것이 없다·
“···나쁘지 않군·”
나는 그저 채점지를 꺼내 들었다·
아직 ‘대인전’ 부분을 채점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이는 훌륭한 시험이 되어줄 것이다····
◈
콰아앙─!
이고르가 휘두른 대검이 지면에 부딪혔다·
동시에 카셀이 소환한 기사 분신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베키와 루이스를 향해 위협적으로 달려들었다·
두 마법사는 곧바로 산개해서 피해냈다·
쾅─! 쾅─! 쾅─!
얼음 방벽 위로 수 많은 검격이 몰아쳤다·
“방어는 내가 할게!”
베키가 방벽의 강도에 집중하며 소리쳤다·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루이스의 섬광은 빠르고 또 묵직하다· 분신을 침착하게 하나둘 치워냈다·
동시에 푸른 무언가가 온 시야를 뒤덮는다·
화륵─!
푸른 화염·
그것이 파도처럼 기사들을 휩쓸었다·
뒤늦게 엘라의 사검이 쇄도했으나· 속도가 현저히 느려져 있는 채였다· 모두 간단히 피해낼 수 있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루이스가 세 남매를 바라보았다·
“너희들 상태가 영 별로인 것 같은데?”
예선이 시작될 떄와 비교했을 때 세 남매의 표정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조급해 보이는 모습· 심지어 둘째인 웬디는 패닉 상태에 빠져 전투에 참여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처럼 해서는 베키의 얼음을 못 뚫을걸?”
“····”
루이스의 명백한 도발에도 세 남매는 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뿐이었다·
그들은 현재 음성으로도 손에 쥔 검으로도 마법 학부 대표들에게 대답을 해내지 못했다·
쿵!
그런데 그때 지면으로부터 거대한 나무뿌리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수림의 세계수를 연상케 하는 거목 환상수였다·
동시에 세 남매가 다시 지면을 박찼다·
루이스가 빠르게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났고 남은 공격들이 자연스레 베키를 향했다· 베키는 얼음을 빠르게 방패 형상으로 펼쳤다·
“오잉····”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방어가 쉬웠다·
루이스의 말대로 지금의 세 남매는 베키의 얼음 방벽을 전혀 뚫어내지 못했다·
베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봐 봐주시는 거예요?”
“···?”
“아 아뇨· 진짜 뭐 나쁜 의도가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워 워 원래 엄청 강하지 않았어요?”
“으랴아아아─!”
이고르가 몸집을 배로 키우며 대검을 휘둘렀다· 허나 그렇게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보인다· 이제는 자기 몸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몸을 보호하는 것도 제법 여유로웠다·
“트릭시!”
베키가 신이 나서 외쳤다·
“공격· 공격만 하면 돼! 내가 다 방어 중이야!”
그런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눈을 굴려 옆을 바라보자 트릭시가 그저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기요· 가만히 서서 뭐 하시는····”
말이 끝맺어지기도 전에 뿌리와 검이 들이닥쳤다· 베키가 답답해서 부르짖었다·
“야! 뭐 좀 해보라고!”
“···봤어·”
트릭시가 그제야 낮게 읊조렸다·
동시에 근처의 마나가 엄청난 열기를 머금고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주변 시야가 온통 아지랑이에 이글거릴 정도다·
솔직히 베키는 좀 당황했다·
“···야는 좀 그랬나? 호 혹시 화났어?”
트릭시는 대답 없이 화염을 휘둘렀다·
푸른 불길 앞에서 검은 튕겨 나가고 뿌리는 갈라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릭시는 확신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확실하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한 치의 앞도 살필 수 없는 지금도···· 트릭시는 이상하리만치 침착할 수 있었다·
아니 그녀는 어쩌면 한 치 앞을 안다·
“분명히 봤어·”
박람회장 사포어에서 보았던 여러 장의 그림 중 하나· 승리를 거머쥐고 기사 학부의 경기장에 당당하게 두 발을 딛고 서 있던 자신·
이 순간의 광경을 그녀는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의 모습도·
화악─!
화염의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다·
환혹 세계에서 훈련할 때보다도 성장한 경지· 지금 이 상태라면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트릭시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화염에 온 마나가 집중되고 소녀는 그것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주 전력을 다해·
◈
“흠·”
채점에 열중하던 나는 문득 미간을 좁혔다· 동시에 등 뒤에서 지면을 뚫고 뿌리가 솟아났다·
딱─!
손가락을 튕겼다·
흉포게 휘둘러지던 뿌리는 그대로 정지했다·
내가 통째로 마비시켰다· 행동을 멈춘 채 굳어버린 거대 뿌리는 그 자체로 보호 방벽이 된다·
나에게 휘둘러지는 다른 뿌리들을 그것으로 막아내며 묵묵히 채점을 재개했다·
“···봐줄 만하군·”
세 마법사가 기세 좋게 전투에 임하기 시작했다· 원소는 발현되는 족족 기사에게 적중한다·
적중률에서 가점·
각각 치명적이고 강한 공격은 아니었으나 지금의 세 남매에게는 그것조차도 매우 큰 타격이다·
동시에 거대 뿌리가 소용돌이처럼 몰아쳤다·
세 마법사가 빠르게 거리를 벌린다·
회피에서 가점·
그러나 근접전에 임해야 하는 기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하나 둘 셋 넷···· 어느새 세 남매의 근처에는 뿌리가 가득했다·
쾅─ 쾅─ 쾅─
환상수는 단계의 값을 톡톡히 해냈다· 덩치가 커다란 이고르는 결국 뿌리 하나에 몸이 휩쓸렸다·
저 멀리까지 날아가 벽에 처박힌 뒤 그는 곧바로 송환되었다·
고전하는 것은 카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신은 생성되는 족족 뿌리에 튕겨 나가 카셀은 사실상 고유 능력을 봉인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루이스가 그 빈틈을 빛 화살로 파고들었다· 카셀의 입에서 피가 토해지고 그 역시 치료소로 송환되었다·
“하아···· 하아····”
홀로 남은 엘라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짓씹은 아랫입술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예기를 잃은 사검과 기세를 탄 마법사 셋· 어느 쪽이 더 유리한지는 굳이 따질 필요도 없었다·
“····”
이내 결정을 내렸다는 듯 엘라가 검을 역수로 쥐었다· 그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엘라는 감은 눈으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동시에·
푸욱─
제 검으로 자기 손목을 꿰뚫었다·
“···!”
마법 학부 대표 셋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살하여 송환하는 방식의 중도 포기는 명백한 규칙 위반이고 이로써 마법 학부의 승리가 확정되었다만 지금은 기뻐할 때가 아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환상수에게 향했다·
쿵─ 쿵─ 쿵─
녀석은 지금도 지면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뿌리를 허공으로 솟구쳐 올리는 중이다·
저 녀석을 처치하지 않는 한 마법 학부는 1등으로 예선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뭐 좋다·”
나는 채점지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확인하고자 하는 성과를 확인했고 채점하고자 하는 것을 전부 채점했기에 환상수 정도는 기꺼이 내가 상대해줄 의향이 있다·
마나의 잔량이 하찮다·
당연한 일이었다· 경기장의 구조에 개입한 것으로도 모자라 정순한 불꽃으로 화랑을 다루었고 심지어 엘라의 사검을 상대해내기까지 했으니·
그러나·
“더없이 충분하다·”
이 거대한 나무가 세계수라 불리지 못한 채 마수로 남은 이유를 나는 알 것만 같다·
‘결국 소환수이기 때문이지·’
나는 여전히 굳어있는 뿌리에 손을 얹었다·
구조가 훤히 보인다· 약점 회로 배합 성분 원리····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조금의 오차도 없이 해체 명령을 내렸다·
쿠구구구구구─
다음 순간 환상수가 서서히 입자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반짝이는 가루로 변모하여 허공에서 온통 아른거렸다·
조그만 보석 같은 것들이 천천히 낙하한다·
이 가루 하나하나가 전부 환혹 성분을 품고 있다· 물론 이것도 삭제하는 것이 가능했다만···· 내가 일부러 남겼다·
고생한 그들에게 주는 자그마한 보상이다·
루이스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와 감탄이 혼재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환상 축복이구나 장난 아닌데·”
“····”
트릭시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감상에 젖었다· 작은 보석들이 하늘하늘 내려앉는 풍경은 그녀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루이스가 천천히 주저앉아 눈꺼풀을 감는다· 트릭시도 이내 바닥에 쓰러져서 아이처럼 새근새근 잠들었다·
다만 나는 멀쩡했다·
당하고 싶어도 당할 수 없다· 이 환혹 가루가 내 정신력을 상회하지 못하는 탓이다·
그러한 와중 베키가 해롱대면서 움직였다·
픽 쓰러져서 내게 기대는 베키를 그냥 받아주었다· 이 정도 어리광은 감점 한 번으로 셈 쳐줄 수 있다·
‘그럼···· 총합 100번 감점인가·’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이 경기장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천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관중석·
수천의 눈동자가 오로지 나를 바라본다·
◈
반짝이는 환혹 가루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세례라도 받는 듯한 풍경 속에서 베키는 정신이 몽롱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환상 축복·
들어본 적 있다·
환상수는 쓰러질 때 환혹 가루를 남기며 인간에게 더없이 행복한 환상을 선사한다고 한다·
이 ‘환상 축복’이야말로 토벌제 예선 승자조가 받을 수 있는 진정한 보상이라는 우스갯소리가 학생들 사이에서 꽤 돌 정도다·
이내 나른해진다·
잠이 밀려오는 강도가 생각 이상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심을 잡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괜찮겠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차피 예선은 종료되었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마법 학부는 승리했다· 그러니 이제 조금 정도는 쉬어도 될 것이다·
“····”
베키의 몸이 무언가에 탁 기대어졌다·
단단하지만 또 이상하리만치 듬직한 무언가라서 베키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
그리고 플란의 품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순간 베키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이내 납득했다·
···응 이건 환상축복이니까·
플란과 단둘이 남은 듯한 감각 베키는 왜인지 모를 익숙함을 느꼈다·
머지않아 그 이유를 깨닫는다·
마법 미궁에서 지하로 끝없이 처박히던 순간 베키는 그때도 플란과 단둘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좋았던 것 같다·
더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눈이 떠지지 않았고 잠기운에 저항하는 것이 불가했다·
베키는 그저 플란의 옷깃을 꼬옥 쥐었다·
커다란 환상·
동시에·
자신에게 주는 작은 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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