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2
“····”
잔불의 기사· 유디트 가문의 차기 가주·
스칼렛 유디트·
그녀의 입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와중에도 그녀의 눈은 점수판에서 떼어지지 않는 채다·
1위 : 1001점·
2위 : 972점·
3위 : 904점·
충격적인 결과 바라보던 스칼렛의 시선이 천천히 한 명에게로 옮겨간다·
플란 유디트·
1001점을 획득한 마법 학부의 대표·
‘환상 축복’이 발동한 지금도 그는 지면을 딛고 서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전망 좋은 공간· 스칼렛을 비롯해 기사들이 잔뜩 앉아있는 이곳은 숨 막히는 정적으로 가득하다·
누구도 입을 열어 침묵을 깨려 하지 않았다·
플란에 관한 의문 상황이 이렇게까지 치달은 원인 기사의 체면을 구긴 엘라의 자살 송환····
당장은 그 모든 것들이 아무래도 좋았다· 나중에 샅샅이 파헤치더라도 충분할 테니까·
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플란이 기사 학부의 모든 조를 짓밟고 1위에 올라섰다는 사실 그 자체다·
‘아카데미 역사상···· 이런 일은 없었다·’
기사 학부와 마법 학부는 늘 서로를 경계했다·
사적인 감정은 제쳐두고 성적만 놓고 보더라도 기사 학부는 2종목 토벌제에 있어서 늘 우위였다·
표현 그대로 ‘늘’ 그러했었다·
마법 학부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쥔 것은 그녀가 아는 한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경기장의 관중은 기사 학부의 생도들로만 이루어진 채다·
이변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경기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이변이 생겨버렸다·
스칼렛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에 힘을 주고서 플란의 모습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여유롭다·
상황도 상황이지만 플란의 저 태도가 결정적으로 스칼렛의 속을 미친 듯이 긁고 있었다·
승리의 기쁨 예선이 끝났다는 안도감 기적을 이뤄냈다는 놀라움 성취를 향한 뿌듯함···· 그 일련의 감정이 플란에게는 전혀 없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듯한 얼굴·
유디트의 핏줄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무책임하게 검을 놓아버린 게 플란이다·
그런 가문의 수치가 도대체 어떻게·
머릿속이 뜨겁다· 뜨겁다 못 해서 뇌까지 익어버릴 수준이라 스칼렛은 손 하나로 제 얼굴을 덮었다·
그녀의 위엄을 생각한다면 결코 남 앞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속을 온통 헤집어놓는 이 격정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정규 기사 하나가 스칼렛에게 다가왔다·
“기사님····”
“그만·”
스칼렛이 그것을 멈춰 세운다·
“···그 이상 가까이 오지 마·”
그녀는 현재 호흡하는 것조차 낯설다·
스칼렛을 향해 닿는 시선 경기장의 분위기·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왜·’
그간 살아오면서 어느 지면을 밟든 위화감을 느꼈던 적이 없었다·
압도·
그녀는 공간 자체를 압도하는 기사였다· 그녀가 등장하면 그것만으로도 다른 기사들의 얼굴에는 기대와 자신감이 들어찼다·
‘왜····’
하지만 지금은 왜 그렇지 않은가·
그녀는 이미 정답을 알았다· 현재 스칼렛이 눈동자에 담은 인물 또 다른 유디트의 핏줄·
‘플란 유디트·’
지금만큼은 그가 이 공간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스칼렛은 ‘압도’를 위해 일평생을 쏟았다· 그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온 기사들이 전율할 수 있도록 검을 휘둘러왔단 말이다·
그러나·
플란은 고작 예선 하나로 온 기사들의 머릿속에 우려와 걱정을 심어놓았다·
‘···저택에서 보자·’
잔잔한 불길처럼 분노가 스칼렛의 전신을 휩쓸었다· 붉은 눈동자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
동시에 미약한 현기증을 느끼며 심호흡했다·
현재 많은 기자가 스칼렛을 주시하는 중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법 학부의 기자 세피아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다음은 뻔하다·
스칼렛이 보였던 반응 하나하나가 곧 신문 기사로 보도되리라·
그걸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어지럽다····
◈
[ 예측 ]· 간판에 그리 적혀있는 가게·
“어 어···?”
누군가의 입에서 의문이 새어 나온다·
“어라···?”
이내 그것은 전염병처럼 퍼진다· 손님들이 저마다 입에서 의문을 하나씩 토해냈다·
어느 순간 모든 소리가 잦아들었다·
전원이 숨소리조차 죽인 채 그저 각자의 손에 쥐어진 기록지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 토벌제 예선 기록 ]
▶ 엘라가 규정 위반 자살 송환했습니다·
▶ 환상수가 토벌되었습니다·
▶ 마법 학부가 승리합니다·
▶ 1001점 1등으로 본선에 진출합니다·
마침내 그리 적힌 순간· 상점 내부에는 어떠한 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법 학부의 승리는 당연히 기쁜 일이다·
다만 아예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기에 얼떨떨하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기적이었고 눈앞에 놓인 현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 우리가···· 정말로 이긴 건가?”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1등으로 본선에 진출···?”
다시 공허에 가까운 정적·
그 정적을 깬 것은 새하얀 소녀 유시아였다· 그녀가 쾌재를 부르며 재무관을 붙들었다·
“와! 이겼다! 이겼어! 이것 좀 보십시오! 플란 경이 또 해냈습니다~”
“···예 예·”
재무관은 어색하게 반응했다· 스스로 나름 차분하다고 자부하는 그조차도 아직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기쁨은 나누면 오히려 두 배가 된다고 합니다· 어서 두 배로 기뻐하십시오!”
“우 우선 진정을 좀 하시고····”
“응원 인사를 직접 못 드려서 염려했었는데 다행히 잘 해내셨습니다!”
재무관은 유시아를 말릴까 하다가 어느 순간 그만두었다· 도리어 그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유시아·
그녀는 마인의 습격으로 중병을 앓아 무려 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침상에만 누워있었다·
그 사실에 한탄하며 하루하루 시들어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텐데 이렇게 밝은 모습을 보이니 도무지 말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이들의 반응도 마침내 폭발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미쳤다! 미쳤어! 그것도 1등으로!”
“한 달 용돈 다 날렸네····”
“근데 왜 그렇게 웃고 있어?”
“마법 학부가 이겼잖아 인마!”
“어지럽다···· 나 머리가 어지러워····”
가게가 통째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황실 재무관은 놀란 눈으로 이 광경을 살폈다·
현재 이들에게는 다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어떠한 구속으로부터도 해방되어 다 같이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플란·
자연스레 플란에 관한 흥미가 솟아오른다·
많은 마법사 학생들에게 이렇게나 큰 격정을 선사한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이 정도 위인이라면 황실에서 이름이 오르내리기엔 충분할 테다· 특히 셋째인 유시아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니만큼·
◈
“····”
메르헨 아카데미의 치료소· 3인 환자실·
‘환상 축복’으로부터 깨어나 의식을 되찾은 후 세 대표 사이에서는 정적이 흘렀다·
환상보다도 더 환상 같은 일들이 현실이 되어 세 명을 기다리고 있는 채였다·
‘···우리가 진짜 이겼나·’
‘우리 본선 나가는 거야?’
대표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확히 아는 것이 없었다· 승리의 순간 곧바로 환상 축복을 맛보며 잠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결과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허공에 기록지 하나가 펼쳐진다·
[ 토벌제 예선 기록 ]
▶ 마법 학부가 승리합니다·
▶ 1001점 1등으로 본선에 진출합니다·
“허어억!”
베키가 화들짝 놀라하며 침상을 뛰쳐나갔다· 그 요란한 동작에 트릭시가 미간을 좁혔다·
“우 우리 본선 나가는 거야? 아니 물어볼 것도 없구나· 나 나 나가네? 그러네?”
트릭시는 나서서 한마디 할까 하다가 문득 베키의 마음도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평민이고 또 평범한 성적·
신분을 이유로 당하는 무시와 차별· 베키는 그러한 것들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감내해왔다·
또 대표로 선발되었을 당시에도 트리비아에서 매일같이 욕을 들었던 베키다·
그녀의 심정이 어떻고 부담감은 또 얼마나 거대했을지· 트릭시는 추측조차 할 수 없다·
···오죽 기쁠까· 가만히 놔두기로 했다·
베키는 계속해서 방방 뛰었다·
“우리가 1등이래! 1등!”
루이스는 조용히 트리비아를 펼쳤다·
자유 게시판은 이미 전쟁터가 되어있었고 그들의 반응은 베키와 별 차이 없었다·
[토벌제 예선 1등은 아예 최초라는데?]
[와···· 이러면 본선 기대해봐도 되나?]
[대표들 진짜 너무 고생했다· 어떡해 ㅠ]
[직관 못한 게 너무 억울하다· 진짜·]
반응을 살피며 루이스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트릭시는 그런 루이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뒤늦게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시선이 날뛰는 베키에게로 향했다·
“베키·”
“아싸아···! 으 응?”
“약속 지켜·”
“무슨 약속? 아·”
되물은 뒤에야 약속의 내용이 기억났는지 베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트릭시가 말을 이었다·
“아고라보드· 1등으로 예선 통과하면 말하기로 했잖아·”
“어····”
베키의 시선이 슬그머니 사선으로 향했다·
그녀는 일전에 트릭시와 이야기하던 도중 플란에 관한 이야기를 실수로 흘려버렸다·
···무마하기 위해서 1등으로 예선 통과라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그것이 정말로 이루어져버렸다·
“말할게 말하는데····”
“말해·”
“그런데 플란! 지금 플란은 어디 있지?”
베키가 황급하게 말을 돌렸다· 그러나 효과만큼은 아주 훌륭했다·
모두의 생각이 순식간에 플란으로 쏠렸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사실 플란이 해낸 것에 비하면 환자실의 세 명이 해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플란이 비추어준 방향을 따라 그저 걸은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승리의 주역 플란이 보이질 않는다·
루이스가 볼을 긁적거렸다·
“아하하···· 혹시 우리 100번 넘게 감점당한 건가? 그래서 기권하러 갔다든가····”
베키가 엑 하는 소리를 냈다·
“루이스· 아무리 플란이라도 그건 좀····”
말을 잇던 베키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서 백 번이 넘는 생각을 했지만 하면 할수록 플란은 정말 그렇게 행동할 인물이었다·
베키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서 서 설마 진짜인가?”
“가능성 있는데· 우리 실수 좀 하지 않았어?”
“····”
세 명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베키가 허둥대기 시작했다·
“애 애들아· 우리 이럴 때가 아니었네· 어서 플란부터 찾자·”
“그러게· 그래야겠는데·”
“···짜증 나·”
나머지 두 명도 허둥대며 채비하기 시작했다· 비록 환자복 차림이지만 지금은 복장을 가려가며 행동할 시기가 아니다·
똑똑─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플란?”
“플란!”
“플란·”
모두가 동시에 외쳤다· 현재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름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베키가 쏜살같이 달려가서 문을 열어젖혔다·
“야 플란! 너 혹시 기권한 거 아니····”
그리고 저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지?”
다음 순간 베키를 향해 파도가 몰아친다·
“마법 학부가 승리했습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실종되었던 3일간 무엇을 했나요?”
“플란 학생은 어떻게 화랑을 다룬 겁니까?”
“플란 학생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기자들이 태풍처럼 들이닥쳤다·
안정을 취해야 할 치료소는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기자들이 해일처럼 밀려 들어오고 목이 터져라 질문을 외쳐대고 있었다·
“····”
베키와 루이스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플란·
그저 그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건 아직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아····”
그때였다· 아직 온전치 못한 몸을 가누고 일어선 트릭시가 소란스러운 파도 사이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병실까지 기어와서 환자 앞에서 펜대 놀리는 건 도대체 어디서 배워 먹은 직업윤리야?”
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일갈하자 모든 기자가 한순간에 침묵에 빠졌다·
프리츠의 위엄이 녹아든 축객령은 더없이 싸늘했다· 프리츠가 화염을 다루는 가문이라는 사실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알아들었으면 꺼져·”
기다란 한숨을 내쉰 트릭시가 이마를 짚은 채 문을 닫고 돌아섰다·
문득 고개를 든 트릭시의 얼굴이 따가웠다·
“···뭐 왜·”
쉽사리 이런 일을 겪어 보지 못했을 애송이 두 명의 반짝이는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먼치킨 대마법사 이모티콘이 출시되었습니다·
사실 작가의 말에 무언가를 적어넣는 것이 망설여졌습니다· 작가의 말은 무엇이 적히든 어찌보면 소설의 몰입을 방해할 수 있는 요소니 말입니다·
다만 오늘만큼은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독자님들 덕분에 이런 것도 해볼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작가가 누릴 수 있는 커다란 영광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더더욱 열심히 집필하겠습니다·
또 후원 감사인사를 갱신했고 후원해주신 분들께도 아주 크게 감사드립니다· 연재하는 데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한 글 꾸준한 삽화 그리고 6월중에는 베키 표지로 뵙겠습니다·
zakuti님 영광입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