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5
“···스캔들 내가?”
그저 어이가 없었다· 농담일까 했으나 세피아의 얼굴은 현재 더없이 진지하다·
세피아가 허겁지겁 품속에서 신문 한 장을 꺼낸다· 나는 그것을 곧바로 허공에 펼쳤다·
[ ‘권력형 성범죄’앞에 무너진 피해자 보호· 플란 애초부터 마법 학부 편집부와 친분 있었다· ]
“하·”
정작 기사를 살피니 웃음이 새었다· 이 감상을 굳이 표현하자면 귀엽다· 하지만 반갑진 않으니 ‘가소롭다’ 정도로 할까·
기숙사에 처박혀있는 3일간 메르헨 일보 편집부와 친분이 있는 내가 권력을 이용하여 다른 대표 여학생의 육체를 양껏 착취했다는 내용·
추측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가능성을 논하지도 않는다· 아예 대놓고 ‘권력형 성범죄’를 확정해놓았다·
[ 피임 도구를 구매한 이력이 전혀 없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상황을 그려보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
“재미있군·”
우선 기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기사 학부의 편집부 베스·
나는 세피아에게 물었다·
“베스· 유명한 기자인가·”
“알아보니까 아예 막내 기자에요· 그런데····”
세피아가 콱 소리가 나게 신문을 구겼다·
“몰라서 철없이 저질렀다기엔 악의적인 부분이 너무 많아요· 수습하려고 애쓰는 중인데 수상할 정도로 잘 퍼지는 것도 이상하고요·”
“흠·”
“그런 것 같아요· 애초에···· 플란 학생이 저랑 교류했다는 건 일개 막내 기자급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에요·”
“총대를 맸을 뿐이군·”
뒤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고 배후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연스레 누군가가 떠오른다·
미친개 저승사자···· 그러한 별명을 지닌 기자 단독 취재때 더없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 인물·
기사학부의 편집부 부장 일라이자·
세피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게 허무맹랑한 소리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언행에 주의하시구요· 다른 대표들한테도 곧장 가봐야겠어요·”
그녀는 곧바로 자리를 떠날 채비를 하다가 문득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플란 학생 근데···· 여자에 관심이 있긴 해요?”
“훌륭한 마법사면 고려정도는 해보겠지·”
“참나 다음 열애설은 총장님이랑 나겠어·”
세피아가 픽 웃음을 터뜨린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은 가벼워진다·
“입장표명은 어떤 식으로 원해요? 당연히 플란 학생이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요·”
“그냥 놔두지·”
세피아의 말을 단칼에 잘라냈다· 그녀의 표정에 물음표가 가득해졌다·
“네 그럼 그냥 놔두는 걸로···· 아니 아니죠· 이걸 가만히 놔둔다고요?”
“그래·”
어안이 벙벙한 세피아를 뒤로했다·
건물을 벗어난 후 곧장 마탑의 호텔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촉박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대표들을 훈련시켜야했고 유디트의 저택에서 소화해야만 하는 일정이 있다·
그런데 그때·
“바쁘신가봐요·”
고혹적인 음색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머리카락부터 착장까지 온통 검은색· 메르헨 일보 기사 학부의 편집부 부장 일라이자가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음 하긴· 바쁘실 만도 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일라이자는 짐짓 여유로운 태도로 내게 다가왔다·
“메르헨 일보 일라이자입니다· 플란 학생 나는 학생한테 궁금한 게 굉장히~ 많은데요·”
“질문은 마법 학부를 거쳐서 하도록·”
“또 반말이에요 플란 학생? 나이는 이쪽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일라이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법 학부를 거치라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마법 학부 거쳐서 거절하시게요?”
“당연하지·”
내 말이 우스운지 일라이자는 검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코웃음을 쳤다·
그녀가 자연스레 본론을 꺼냈다·
“예선 이후 대표 교체 소식이 없네요· 정말 이대로 쭉 가는건가? 1학년을 왜 대표로 선발했는지 아직도 궁금하거든요·”
“네가 막내 기자를 해고하지 않은 이유와 같다·”
일라이자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진다·
“갑자기 웬 막내 기자?”
“허무맹랑하고 재미없는 삼류 소설 쓰레기에 가까운 기사만 써내는 막내기자를 네가 왜 해고하지 않았을까···· 뻔하지·”
내 붉은 눈동자가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향한다·
“말을 잘 들으니까· 나도 비슷하다·”
“····”
잠시 정적이 흐르고 이내 그녀가 미소지었다·
“재밌네요· 마법 학부 거쳐서 정식으로 거절당해드리죠·”
일라이자가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 메르헨 일보 기사 학부 부장 일라이자 ]
내가 말없이 응시하자 그녀가 명함을 아주 살짝 흔들며 나를 재촉했다·
“이건 받아두세요·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
나는 그녀의 명함만 집어들었다·
“너에게 한 마디만 하지·”
“이왕이면 여러 마디로요· 제가 기자라서·”
그녀의 명함에 적혀있는 활자 중 일부를 삭제한 뒤 그대로 돌려주었다·
[ 일라이자 ]
“···?”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 초점이 흐려졌다·
명함에 정교한 환혹을 심었다· 현재 마법 학부가 환혹 세계에서 노력했던 모습들이 일라이자의 눈 앞을 스쳐지나갈 것이다·
다음에는 장면을 바꾸었다·
거짓말쟁이를 처벌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 화형· 환상 속에서 그녀는 저항할 수 없이 묶여 영원히 타오른다·
잠시 후 환혹을 종료하고 한마디 했다·
“명함에 기자라는 말을 덧붙이려면···· 적어도 거짓 기사를 못본 체 하지는 말아야지·”
“····”
일라이자는 잠시 멍해져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있던 커피를 전부 들이켰다·
가만히 서있는 일라이자를 지나쳤다·
그녀가 무엇을 지시했고 현재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건 이제 내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정정보도를 내보내지 않았을 시 벌어질 일을 이제는 나도 그녀도 확실히 안다·
◈
아카데미 외곽에 위치한 폐가·
“으····”
기사 학부의 2학년 네 남매의 첫 째 엘라는 바닥에 쓰러진 채 신음했다·
죽음·
이제 엘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 뿐이다·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치닫게 된 건가 엘라는 알 수 없었다·
검을 쥐려해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으으·”
애초에 엘라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발뒤꿈치의 힘줄이 끊어졌고 훌륭하던 기감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채였다·
그런 엘라의 눈에 세 남매의 모습이 보였다· 몸이 동강나고 유해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 모습·
시체라고 칭하기도 망설여지는 몰골이다·
토벌제 예선 후 네 남매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생과 사가 갈릴 정도로·
“저기 내 말 들리지?”
차분한 음색· 엘라의 눈동자가 목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굴러간다·
1위 길드 신비의 협곡에 가입이 예정된 기사·
생도 기사단 ‘천축’의 단장 자네트였다·
쓰레기 몇 개 치웠다는 듯 처참한 풍경 한가운데에서도 그녀는 더없이 평온했다·
“도망다녀도 소용 없어· 알잖아·”
그녀가 세검으로 엘라의 양 어깨와 허벅지를 연달아 꿰뚫었다·
동시에 엘라는 사지의 감각을 잃었다·
“억울해하지도 말고· 기사의 수치인 너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어·”
엘라의 머리맡에 자네트가 종이 한 장을 두었다·
[ 명예 처형 ]
명예 처형·
대상의 숨통을 기필코 끊어놓는 이 극단적인 명령은 원칙을 어겨 기사의 명예를 실추시킨 범죄자를 상대로만 내려진다·
그리고 토벌제 예선의 2등 조 ‘천축’은 현재 그 임무를 네 남매를 상대로 수행해낸 참이다·
쉽게 내려지는 명령이 아니지만 이성을 잃은 네 남매가 우발적인 살인까지 저질러버린 탓이다·
“자네트 거기 마무리 됐어?”
“응· 다 됐어·”
천축의 다른 남기사 하나가 엘라를 경멸스레 내려다보았다·
“기사가 예의라곤 조금도 없고 거기에 자살 송환 범죄까지···· 적어도 살인은 하지 말았어야지· 부끄럽지도 않나·”
남기사의 시선이 다시 자네트에게 닿는다·
“자네트 이거 진짜로 확실히 작업 된 거지?”
“그래· 고유능력을 사용했어·”
“확실히 해야 돼·”
자네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했대도· 못 믿겠으면···· 한 번 찔려볼래?”
세검을 들어올리며 자네트가 장난스런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네트의 고유 능력 ‘급소’· 그녀는 표현 그대로 상대방의 약점만을 꿰뚫는다·
“됐어· 끔찍한 소리 하지마· 아 근데·”
“그거· 마법사가 찔리면 어떻게 되는거냐?”
“마법사는 아직 찔러본 적 없는데···· 으음·”
후웅!
자네트가 허공을 한 번 찌른다· 위력은 상상 이상·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마치 꿰뚫린 듯 하다·
검을 거두어 들이며 자네트가 말을 잇는다·
“아마 다시는 마법을 못쓰게 될 걸·”
천축 기사단이 떠나가며 나누는 시덥잖은 대화가 엘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사지를 마비당한 채로 죽음을 기다리는 것만이 지금의 엘라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아아·”
이제 이대로 죽는다·
본인의 상태가 너무 한심해서 벌레 같아서 쓰레기 같아서 허망했다·
자신의 나약함과 타인을 향한 분노 부정인지 열등인지 모를 감정이 마음을 천천히 적셨다·
한 시간·
두 시간·
여섯 시간·
엘라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벌레가 몸 위를 기고 죽음이 한 걸음씩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좁혔다·
플란·
와중에도 떠오르는 이름은 그것 하나였다·
그가 엘라에게 보여준 경지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한 번 더 보고싶다· 정체를 알아내고 싶다· 또한 이겨내고싶다····
─엘라· 무엇을 원하니·
문득 고요해진 귓가에 미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라는 무언가가 보이는 듯 했다·
어둠속에서도 아주 밝게 빛나는 무언가가·
─내가 이루어 줄 수 있단다·
빛과 목소리는 한층 더 선명해져서 엘라의 마음을 두드렸다· 그녀는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원하는 거· 그건 하나 뿐이다·
플란·
그 놈을 다시 마주치고 싶다·
다시 한 번 마주치고 싶다·
그리고 마주치면····
“····”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다·
허나 삶을 부르짖고 싶었다· 새삼 살고싶다· 이대로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분하다·
─너는 그저 원한다고만 하면 돼·
엘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영혼에 스며드는 무언가를 느꼈다·
◈
마탑의 호텔 대형 객실·
먼저 도착한 마이에브는 홀로 장부를 정리했다· 혈귀 측에 보고할 것도 플란에게 보고할 것도 산더미다· 오늘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턱!
그런데 그때·
누군가 염동으로 마이에브의 장부를 덮었다·
“····”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건 한 명 뿐이니까·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다를까 플란· 다름아닌 그였다·
“오셨어요· 주인·”
“지금은 그런 걸 할 때가 아니다·”
“그럼 뭘 하라는····”
습관적으로 말대꾸를 하려던 마이에브의 말이 끝맺어지지 못했다·
이번 예선 경기를 지켜보며 마이에브의 머릿속에 있는 플란의 위상이 더더욱 높아졌다·
잘못 건드리면 죽을 것이다· 분명·
“뭘하라는···· 걸까요· 좀 알려주시죠·”
“일단 차부터 내오지 그래·”
“···차?”
플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중을 좀 해야겠으니 말이다·”
“예·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난이도가 높지 않아 다행이었다· 물론 어려운 일을 시켰더라도 결국 따라야 했겠지만·
“차는 12분 간격을 준수하며 내오도록· 설탕은 따로 추가하지 않으며 종류는 매번 다르게·”
“····”
분명 난이도가 높지 않았었는데 이젠 아니다·
‘잠시만·’
다시 생각해보니 12분 간격으로 암살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꽤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마이에브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주인·”
“아 그리고·”
“음?”
플란이 미간을 좁혔다· 암살 방법을 궁리하던 마이에브는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환경이 영 별로다· 청소하도록·”
“···?”
마이에브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다른건 몰라도 환경은 어떤 점에서 별로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마이에브가 보기에는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한데·
“이미 먼지 한 톨 없어 보이는데·”
“먼지 한 톨 없이···· 좋다· 지금 그 발언 본인이 책임지는 걸로 보아도 무방하겠지·”
“청소하겠습니다· 욕실도 할까요·”
플란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마이에브는 절망스러운 심정으로 청소에 나섰다·
“청소를 마치면 객실 전체를 화중 세계로 덮어씌운다· 최고의 효율이 필요하니·”
“예····”
마이에브에게 할 일을 내려준 뒤 플란은 염동을 활용해 총 32권의 도서를 허공에 걸었다·
“앞으로 고작 삼일인가·”
플란이 낮게 읊조렸다·
1분 1초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다면 시간은 충분하다· 마법 학부의 대표들은 분명 토벌제에 걸맞는 인재가 될 수 있으리라·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학습할 것들을 제시하는 정도로는 결코 안 된다· 보자마자 이해하고 곧바로 적용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가 요구된다·
따라서 유디트의 저택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이 서른 두권의 자습서를 제작해야만 했다·
“···한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저 할 뿐이다·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그냥 하면 될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조화(調和)·
본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정순함을 높이고 발현 속도를 감축시키는 것은 개인의 역량을 높이는 일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세 대표가 조화를 이루어 보다 뛰어난 기량을 내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건 과제로 대체하면 될 듯 하다·”
자료와 함께 과제를 제시한다· 목표 달성을 위해 세 명이 조화를 이룰 수밖에 없는 내용으로·
플란의 붉은 눈동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법을 배우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나 가르치는 것에도 또 그만한 묘미가 있다·
이유는 당연히 이 또한 증명이므로·
짧게 심호흡을 한 뒤 플란은 종이 다섯 장의 공백을 동시에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미동조차 없이 자습서를 써 내리는 사내의 눈동자가 몽롱해진다· 그는 아득히 멀리있는 세계 너머의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 하다·
─사각사각·
얼마 지나지 않아 객실 안은 활자가 새겨지는 소리로만 가득 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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