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6
···나는 자습서 제작에 몰두하며 밤을 새웠다·
그 결과 진정 ‘자습서’라 칭할만한 64권의 서적이 탄생하게 되었다· 내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내용을 종이 위에 정성을 들여 새긴 것이었다·
[ 작품명 : 오만과 한심 ]
*풀어주세요· 주인·
한편 벽 한구석에는 마이에브가 액자에 갇혀 걸려있는 채다·
그녀는 차에 극독을 넣었다· 당연히 발각당했고 이만하면 아주 가벼운 처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여전히 대표들을 위해 골몰한다·
“이놈들을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
신뢰하고 최대한 깊은 내용들을 가르치고 싶다만 이 녀석들은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최소한 달리기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역시 믿지 않는다·”
나는 첫 번째 책을 다시 들어 올렸다·
영 번거롭지만 역시 모든 획순을 일일이 그려주기로 하였다· 64권의 서적은 아마 192권 정도로 늘어나겠지·
“아니지·”
···생각해보니 획순 뿐만 아니라 선의 굵기까지도 일일이 짚어주어야 한다·
“못해도 삼 백권은 되는가·”
『 빙(氷) 속성 마법의 조화 』
『 화(火) 속성 마법의 조화 』
『 광(光) 속성 마법의 조화 』
허공에 도서들을 새로 펼쳤다· 지금부터는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친절하고 섬세한 작업이 들어가야만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번 주제는 ‘조화’·
개개인의 뛰어남보다도 서로를 뒷받침하여 혼자라면 결코 발휘하지 못했을 기량을 내는 것이 토벌제 우승을 향한 핵심 열쇠다·
뭐 이 주제를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그들의 몸이 강제로 깨닫게 할 테니까·
똑똑─
해가 밝아서인지 벌써 방문자가 있었다·
나는 여전히 서적에 시선을 둔 채로 객실의 문을 염동으로 열어주었다·
“무슨 일이냐·”
“어···· 나 베키인데· 오늘 여기로 모이라고 해서····”
베키였다·
오히려 나쁘지 않다· 어쩌면 이 방대한 분량 중에서 일부는 베키에게 요약을 맡길 수도 있겠지·
“기다려라·”
나는 그나마 쉬운 부분을 추리기 시작했다· 베키의 지능으로도 요약이 가능할 그런 부분을·
그런데 베키는 이미 무언가를 잔뜩 들고 있었다· 한데 학습 자료가 아니라 신문이다·
“···그건 또 뭐지·”
“아 이거· 다른 게 아니라···· 그 플란· 혹시 신문 기사 읽어봤어? 내가 어제 좀 읽어봤는데····”
횡설수설하는 베키의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짙었다· 딱 봐도 밤을 설친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그럴 시간이 없을 텐데·”
“아···· 근데 여기 완전 이상한 말만 쓰여 있어서· 그러니까 네가 가해자고? 내가 피해자고? 그렇게 적혀있으니까···· 입장 표명을 좀····”
“무슨 입장 표명·”
“어 음· 강압적이지 않았다· 양측의 합의가 있었다· 뭐 그런···?”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따위 입장 표명은 하나마나다· 은밀한 무언가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꼴이 될 테니까·
딱─!
손가락을 튕겨 베키를 얌전히 자리에 앉혔다·
“엑·”
“입 다물고 이거나 요약하지 그래·”
나는 베키에게 자료 몇 장을 건네주었다· 그녀의 앞으로 종이가 수북히 쌓인다·
“어? 아니· 이건 강압이 맞는데····”
“그럼 그렇게 입장 표명해라· 상관없으니·”
“····”
요지는 ‘자료를 요약하라’였는데 베키는 이상한 것에 정신이 팔렸는지 얼굴을 확 붉혔다·
“시작해라·”
“···으응·”
베키는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여섯 시간 후·
시계의 초침만 째깍대는 적막한 객실에서 나는 베키와 여전히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
“저기 플란· 여긴 이 정도면 될까?”
그녀가 내민 자료를 잠깐 곁눈질했다· 그것만으로도 허점투성이인 부분이 열 개는 띄었다·
“···나름의 가위질을 해라· 좀 쳐내·”
“으음 그럴게· 난이도는 이 정도면 돼?”
자료의 난이도를 판단하는 법은 어렵지 않다·
“베키·”
“응?”
“너는 그 자료가 어렵지 않게 이해되는가·”
“응· 집중해서 읽으면 할 만한데?”
베키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괜찮을 것이다·”
“잠깐 그건 무슨 의미야·”
베키의 말을 무시하고 시계를 살폈다· 오늘은 유디트 저택의 오찬에 참여해야 한다·
유디트라는 가문에 나는 일말의 정도 느끼지 않는다만···· 첫 번째로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을 파악할 셈이고 두 번째로 스칼렛의 콧대를 한 번 눌러놓을 때가 되었다·
“이론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초안을 전부 베키에게 넘겼다·
이론도 이론이지만 화중 세계의 장치들을 통해 실전 감각을 기르는 것 역시 중요하다·
토벌제는 대륙 남부에 위치한 ‘베르켈’에서 이루어진다·
베르켈은 마치 어두운 뒷골목을 연상케 하는 마수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튀어나오는 장소라 협력과 조화가 더욱 중시되는 것이다·
─똑똑·
“나야·”
푸른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트릭시가 등장했다·
그녀는 예선 경기 후 곧장 프리츠의 저택을 방문했다· 아마 자랑을 실컷 하고 오지 않았을까 싶다· 가장 기뻤을 당사자 중 한 명이니 말이다·
“이거 봐·”
트릭시도 손에 신문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베키의 것과 같은 내용이 담긴 것은 아니었다·
[ 네 남매 명예 실추로도 모자랐나 ]
*우발적인 살인까지 저질러
가장 먼저 네 남매에 관한 소식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예선에서의 수치가 컸는지 이후 살인을 저질렀고 결국 처형당했다·
“···한심한 것들·”
[ 천축 단장 자네트 ‘몸 상태 최고’ ]
[ 명예 처형 ‘천축’이 수행했다· ]
[ 비난 여론에도···· 아이반 묵묵히 ‘4등’ ]
아이반도 나름 선전했지만 트릭시는 ‘천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도톰한 입술을 달싹였다·
“천축 2등 조야·”
“그런가·”
“신경 써야 돼· 네 명 전부 신비의 협곡에 가입이 예정된 기사고 고유 능력도 상당하니까·”
“그렇군·”
“네 남매를 상처 하나 없이 처형시켰다잖아·”
“그렇단 말이지·”
“····”
트릭시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나를 노려보았다· 눈에서 푸른 화염이 일렁이는 듯했다·
“나중에 확인하지·”
“지금 해·”
나는 트릭시를 무시하고 짐을 챙겼다·
그녀에게 악감정이 있어서 내가 이러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지금은 할 일이 너무나도 많을 뿐·
트릭시가 내 눈앞으로 신문을 확 내밀었다·
“왜 지금 안 해·”
“적이 누구든 상관없다·”
내밀어진 신문을 가볍게 염동으로 치워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트릭시 한 가지는 칭찬한다· 누구처럼 허무맹랑한 거짓 기사를 들고 오지는 않았다는 점·”
“윽·”
자료를 정리하던 베키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는 현재 종이 더미에 파묻혀서 눈사람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베키도 나름 항변할 것이 있었나 보다·
“트 트릭시! 너는 그 기사 신경 안 쓰였어?”
“응·”
“뭐? 도대체 어떻게?”
“난 관심 있는 남자 따로 있어·”
잠시 정적이 흐른다· 베키는 두 번 정도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자료에 밑줄을 몇 번 긋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뭐? 네가? 네가 관심 있는 남자가 있다고?”
“왜·”
“아니····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더더욱 나서서 해명해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 그 사람 현명하니까·”
둘의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지고 나는 유디트 저택으로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나는 액자의 박제가 일정 시간 후 풀리도록 조치했다· 자료 정리가 끝날 때쯤 자유를 되찾은 마이에브가 이들을 적당히 지도해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너·”
트릭시가 내게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연한 갈색 위로 검은색의 재스민이 그려진 제법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 손수건이었다·
“의미를 함께 설명해라·”
“전해줘· 가르침 씨한테·”
꽤 중요한 안건인지 트릭시가 한 번 강조했다·
“꼭 전해줘·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잖아·”
“특별히 그리하지·”
평범한 손수건은 아니고 마법적인 기운이 깃들어있다· 나는 그것을 별말 없이 받아들었다·
◈
풀밭· 그 위에는 잘 깎여서 놓인 암석이 하나·
그저 그러한 장소일 뿐인데 스칼렛은 다소곳하게 꿇어앉았다· 결코 남이 모를 정념을 느낀다·
이곳이 바로 어머니가 묻힌 묘지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머니의 기일· 스치는 바람이 더없이 무겁다 이곳에서 스칼렛이 느끼는 소회는 고독·
···오로지 고독 그것 말고는 없다·
“저 왔습니다·”
스칼렛은 묘비 옆에 꽃다발 하나를 두었다· 결코 아름답지 못한 잔불에 그을린 꽃다발이었다·
타인의 출입을 미리 통제해두었으니 현재 스칼렛 이외에는 이곳을 누구도 방문하지 못한다·
“····”
다소곳하게 꿇어앉은 뒤 스칼렛은 한동안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바라보았다·
십 분 삼십 분 한 시간·
그저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자신을 향한 못미더움 어머니를 향한 의문 그리고 동생을 향한 원망····
고작 한 줄·
비석에 새겨진 고작 한 줄이 매번 스칼렛의 마음을 너무나도 무겁게 만든다·
“왜···· 저에게 잔불을 주셨습니까·”
[ 영웅 ]
[ 작열의 기사 ]
[ 에블린 유디트 ]
작열(灼熱)·
불꽃의 생애에 있어 가장 화려한 순간· 함께 타오르는 것은 신념과 의지·
그 분께서는 스칼렛에게 ‘잔불’을 남기셨다·
스칼렛은 궁금했다·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고 화가 나고 원망스럽지만· 그 이전에 그저 궁금했다·
작열의 기사 당신께서는 도대체 왜·
그 못미더운 녀석을 위해
희생하셨는지·
또한 어째서·
스칼렛에게는 잔불만을 남기셨는지·
“···그놈은 검을 놓았습니다·”
스칼렛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작열의 기사가 온몸을 다해 맥을 이어놓았던 한때 스칼렛이 검을 휘두르는 이유였던 스칼렛처럼 훌륭한 기사가 되고 싶다 말했던
아마 남동생이었던 그것은
더 이상 기사의 길을 걷지 않는다·
“····”
장갑을 벗었다· 묘비에 힘없이 손을 얹었다·
작열이라는 이름이 어색할 정도로 묘비는 과하게 싸늘하다· 스칼렛은 조용히 그것을 데웠다·
여기사의 잔불에 묘비는 붉게 빛난다·
하나 이렇게 해도 아무리 데우고 또 불태워도···· 그분의 불꽃은 절대 살아나지 않는다·
또한 스칼렛의 불꽃은 작열하지 못할 것이다·
“····”
숨이 막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매년 이러하다·
어쩌면 지금 한 해에 단 한 순간 지금만큼은·
스칼렛은 기사가 아닌 딸로서 어머니인 에블린 유디트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스락·
그때 들려온 유난히 선명한 발소리·
스칼렛은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가에 살짝 맺혀있던 무언가는 불기운에 금세 날아가 버렸다·
“누구냐·”
타인의 출입은 통제되었을 텐데·
그러나 잠시 후·
“너는····”
스칼렛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녀석은 조용히 서 있었다· 어떠한 감정도 없다는 듯 평소처럼 너무나도 태연자약할 뿐이다·
또한 확실히 타인이 아니었다·
“선물은 잘 받았나· 스칼렛·”
자신을 똑 닮은 붉은 눈동자·
플란 유디트·
그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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