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7
“선물은 잘 받았나· 스칼렛·”
플란은 언제나처럼 태연하게 묻는다·
스칼렛은 그의 붉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악의랄 것도 적의랄 것도 없었다·
선물·
선물이라· 이내 기억이 났다·
“하····”
스칼렛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마법 학부에서 개 사료 주듯이 건네준 선물· 그것을 생각하니 분노가 확 차올랐지만 현재로서는 오히려 그게 나았다·
머리가 차게 식었다· 덕분에 감정의 파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가능해졌다·
파도를 넘어선 해일이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휩쓸렸다· 그 상태로 있었더라면 훨씬 안 좋은 상황에 치달았으리라·
스칼렛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시비도 때와 장소를 가려가면서 걸어라·”
한 마디 한 마디 사이의 공백이 꽤 길었지만 그녀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방에 얌전히 박혀있어· 따로 호출할 테니·”
“스칼렛·”
플란이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부른 순간·
화악─!
그에게로 엄청난 열기가 몰아쳤다·
플란의 옷자락이 뒤로 흩날렸다· 손에 들려있던 꽃다발이 그을리다 못해 재가 되었다·
눈 깜빡할 찰나 스칼렛이 열기를 뿜은 것이다·
그러나 플란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옷 끝자락조차 불에 그을린 흔적이 없다·
“나는 너와의 내기에서 승리했고·”
그는 계속 말했다·
“···따라서 뭘 하든 네가 간섭할 수 없다·”
플란은 그 말을 끝으로 염동을 부렸다·
멀리있던 꽃들이 플란의 손에서 일정하게 엮인다· 이내 무척이나 아름다운 꽃다발의 형상을 이루었다·
플란은 천천히 걸었다· 묘비를 향해서였다·
여기사는 그가 묘비에 다가서는 모습을 다소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스칼렛 본인을 찾아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플란은 그을린 꽃다발을 묘비 앞에 가만히 내려둘 뿐이다· 우아하고 절제된 동작이었다·
“····”
스칼렛은 미간을 좁히고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플란이 보인 행동이 예상외의 것이라서 아주 잠깐이지만 당황스러웠다·
그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쯧·”
이내 스칼렛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자리를 떴다·
◈
나는 저택의 방으로 돌아왔다·
전혀 관리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마법을 활용하여 내부의 구조를 곧장 뒤바꾸었다·
“일단 이 정도면 충분할 듯하다·”
내부는 무균실처럼 청결해졌고 커다란 책상을 중심으로 집무실 느낌이 나게끔 배치했다· 또한 마법적인 환경이 갖추어지도록 나름의 ‘최적화’까지 했다·
똑똑─
“도련님 추모는 무사히 마치셨····”
붉은 머리카락의 하녀장 카타리나가 방의 모습을 살핀 뒤 놀라 얼어붙었다·
그녀가 문을 닫은 후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도련님···! 마법 사용은 안 된다니까요!”
“이제 괜찮다· 그 부분은 염려하지 마라·”
“····”
카타리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하나 당연하게도 무언가를 따져 묻지는 못했다·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쉰 후 말을 이었다·
“예· 추모는 무사히 마치고 오셨습니까?”
“그래·”
몸 주인의 가정에 대한 호기심 사자(死者)를 향한 예의· 하녀장의 간곡한 부탁·
몇 가지 요소가 뒤섞여 묘지를 방문하게 되었고 내가 느낀 감상은 얼마 되지 않았다·
[ 영웅 ]
[ 작열의 기사 ]
[ 에블린 유디트 ]
이 세계에서 ‘영웅’이라는 별호를 가지려면 어느 정도의 강함이 필요한가·
또한 그녀가 작열의 기사였다면 어째서 스칼렛은 고작 잔불의 기사로 남아있는가· 일단 그러한 것들 뿐이다·
“내가 요청했던 건 언제쯤인가·”
“예· 지금 가져오겠습니다·”
하녀장이 예의 바르게 물러난다· 밖에서는 사교회가 한창이지만 지금 내 목적은 그게 아니다·
트리비아를 펼쳤다·
[베키 : 와 이거 뭐야?]
[베키 : 애들아 내 말 보여?]
[루이스 : 응응· 보인다·]
[베키 : 진짜 신기하다· 그렇지?]
[트릭시 : 별로·]
[베키 : 응·]
저택으로 출발하기 전 대표들의 트리비아를 손보았고 그 결과가 이러하다·
지금부터는 아카데미를 벗어나서도 이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마나의 소모량이 거리에 따라 비례하여 증가한다만 헤라의 도움을 받아 상쇄할 것이다·
[*마이에브]
[▶ 현재 이론 학습 중이에요·]
“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방대한 양이니 오늘 하루는 이론에만 안배해도 충분하리라· 적용은 내일부터 해도 절대 늦지 않다·
“한데····”
[베키 : 아아악~ 어렵다·]
[베키 : 힘들어· 피곤해서 몸이 무거워···· ]
[트릭시 : 몸은 원래 무거운 거겠지·]
[베키 : 야·]
이론을 학습 중이라는 트리비아에 활자는 계속 올라온다· 상황이 여러모로 모순이었다·
곧바로 마이에브에게 압박을 넣었다·
[▷ 다들 트리비아나 손대고 있는 것 같은데·]
[▶ 잠깐 쉬게 해줬어요·]
[▶ 저도 좀 피곤하고요·]
[▷ 마이에브 액자 안이 편안했던 모양이지·]
[▶ 오늘 내로 전부 끝낼게요·]
[▶ 얘네들 잠 안 재워도 괜찮죠·]
중요한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짚어준 뒤 트리비아를 덮었다· 마침 하녀장이 복귀하기도 했으니·
“요청하셨던 장부입니다·”
“고생했다· 이만 나가보도록·”
“저기 도련님·”
카타리나가 물러나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련님께서 갑자기 장부는 왜 찾으시는지 궁금하여···· 감히 여쭙습니다·”
“마땅한 권리를 찾을 것이다·”
하녀장에게 돌려준 대답은 짧았다·
그러나 표현 그대로다· 마땅히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찾을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않는다·’가 내기의 조건이었으니 스칼렛은 재산의 사용에서도 내게 뭐라 할 자격이 되지 못한다·
나는 표지를 열어 내용을 살폈다·
[ 드로스 ]
[ 기사 가문· 금화 3000개 후원· ]
“흐음·”
장부를 살피자마자 이해가 되었다·
내가 원했던 모습대로 후원금을 비롯한 유디트 저택의 각종 수익금이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마법 학부를 향한 지원금을 거절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그저 당당하게 내 능력으로 얻어낸 금화를 사용하면 될 뿐이니·
마법사의 경우 토벌제에서 중급 아티팩트까지 지참이 가능하다· 나는 대표들의 아티팩트를 이 자금으로 구비해줄 생각이다·
“기사의 돈은 됐다·”
우선 나름의 가위질을 했다·
스칼렛이 임무를 해서 쟁취한 금화라거나 기사 가문으로부터의 후원금은 과감히 제외했다·
“···?”
허나 그러던 와중 나는 문득 고개가 기울었다·
[ 이솔렛 ]
[ 플란 유디트에게 금화 1000개 후원· ]
이솔렛· 이 인물은 유디트 가문이 아닌 몸의 원래 주인을 콕 집어서 후원했다·
후원한 금화는 한 번에 천 개 정도·
다른 후원들에 비하면 큰 액수는 아니지만 거의 매 달을 같은 방식으로 꾸준하게 후원하는 중이다·
그러나 으레 적혀있어야 할 정보가 이솔렛에게는 붙어있지 않다· 기사 마법사 귀족 황실 관계자···· 그 모든 것이·
“카타리나·”
“예· 도련님·”
“내 돈이 전부 어디에 있지·”
나는 하녀장에게 물었다·
“예?”
“이솔렛이라는 이름이다· 거의 매 달을 내게 후원했는데·”
그러자 카타리나가 어깨를 떨었다· 적잖게 당황해하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예···· 예?”
“그렇게 당황해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어····”
“괜찮으니 가감 없이 말하라·”
“음···· 그게 이솔렛은 마녀라서···· 다들 스칼렛 아가씨의 눈치를 보고····”
이솔렛의 정체는 마녀· 호기심이 더 커졌다·
이전 세계에서 ‘마녀’라 함은 아주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직업이었다·
특정 집단에 전속되지 않고 자유 계약에 따라 마법을 제공하는 마법사였으니 말이다· 과연 이 세계의 마녀는 어떤 모습일지·
나는 추가로 물었다·
“그럼 후원받은 금화는 어떻게 했나·”
“아 그건 저도 잘····”
카타리나가 말끝을 흐렸다· 대답이 되었다·
“알았다·”
어차피 금화는 다시 받아내면 그만이다· 다만 기사 가문의 사내와 마녀가 도대체 어떠한 접점이 있었을지가 의문으로 남았다·
“경매는 밤에 시작되는가·”
“예· 도련님 근데 설마····”
카타리나가 아주 조심스레 말을 잇는다·
“경매장에 방문하실 생각이십니까?”
“방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녀장이 염려하며 몇 마디 덧붙이려던 그때·
똑똑─
“하녀장님 잠시 나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누군가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카타리나는 부랴부랴 문밖으로 나갔다·
도청에 취미가 있지는 않으나 방의 ‘최적화’ 덕분인지 문에 닿는 속삭임들이 내게 들려왔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거의 십 년 만이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택을 방문한 거야···?”
“어떡할까요? 도련님을 잠깐 뵙게만 해주면 순순히 돌아가겠다는데·”
“미쳤니? 저택에 마녀를 들여? 스칼렛 아가씨가 두 눈 똑바로 뜨고 계시는데····”
마녀·
고작 두 글자만 듣고도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누구인지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
하녀들이 일시에 얼어붙는다·
다음 순간 그들이 재빠르게 움직여서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하나같이 얼굴이 창백하다·
“도 도련님?”
“도련님!”
카타리나가 땀을 삐질 흘리며 입을 열었다·
“도련님· 거의 다 끝났습니다· 조금만 더 방에 계시면 됩니다·”
“무엇이·”
“사교회 종료가 곧입니다· 후에 가주님과 식사만 함께 하시라는 명령입니다·”
“명령이라· 누가·”
“스칼렛 아가씨의 명령입니다·”
“그딴 명령도 있었나·”
코웃음을 쳤다·
나름 할 일이 있어 방에 있었을 뿐이지만 하녀들은 내가 명령을 곧잘 수행하는 것이라 여겼던 모양이다·
“···이솔렛 그 여자는 지금 어디 있나·”
나는 그 마녀가 궁금하다·
당연한 일이다· 기사 가문에서 태어난 사내가 도대체 마녀와는 어떤 연관이 있단 말인가·
“····”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사교 회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련히 마주치겠지· 발걸음을 떼었다·
“도련님! 안 됩니다! 도련님!”
하녀들이 허겁지겁 내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나는 염동으로 그들의 옷깃을 허공에 걸어버렸다·
“도련니임!”
카타리나의 외침이 다급하다· 하지만 옷걸이에 걸린 의류처럼 제자리에서 버둥거릴 뿐이다·
그 전부를 뒤로하고 사교회장에 입성했다·
화려한 불빛 넓은 공간에 사람이 많다·
최근 아카데미의 인물들만 보아서인지 한껏 꾸민 그들의 외양이 유난히 화려해보였다·
“저택이 그새 더 좋아졌습니다~”
“재무관님 이런 곳에서 다 뵙습니다·”
“곧 검마태제의 토벌제가 시작되는군요·”
여기저기서 이야기가 바쁘게 오간다·
한데 그 많은 인파 속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존재가 있었다·
잔불의 기사 스칼렛·
그녀는 사교회장에서도 혼자 경감 차림을 고수했다· 그러나 늘씬하게 뻗은 신체는 그 자체만으로 어떤 치장보다도 유려하다·
“····”
스칼렛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허나 내게 다가오지는 못했다·
“경갑 차림인데 이토록 빛나시다니요·”
“유디트는 역시 훌륭한 기사 가문입니다·”
이미 많은 인물이 그녀의 주변을 울타리처럼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굳이 그쪽으로 다가가지는 않았다·
이솔렛 그녀를 찾는 것이 목표였으므로·
“···!”
한편 나를 발견한 인물들마다 눈이 휘둥그레진다· 내뱉던 이야기들을 멈추고 얼어붙는다·
내가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교 회장은 점점 더 조용해져만 갔다· 말소리는 줄어들고 나를 향하는 눈동자는 많아진다·
“안 된다니까요···· 그냥 돌아가세요·”
“볼 일만 볼게요· 콜록···!”
그 고요속에서 나는 마침내 이솔렛을 발견했다·
갈무리되지 않고 사방으로 튀는 마나의 기운 창백할 정도로 흰 얼굴색과 허리까지 치렁거리는 흑색의 장발·
저 녀석이 아마 마녀 이솔렛·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플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 누군가가 불현듯 내 앞을 가로막았다·
붉은 단발머리에 이상하리만치 빛을 발하는 황금색의 눈동자· 수려한 외모의 여자였다·
“그냥 방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그녀는 나에게 생긋 웃어준 다음 잠시 고개를 돌려 스칼렛의 표정을 확인했다·
나는 이 여자의 이름을 알고 있다·
정확히는 아카데미의 신문에서 보았다·
“···자네트·”
자네트 프란츠·
그녀는 ‘천축’의 단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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