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8
“그냥 방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손이 닿으면 베일듯한 붉은 색 단발머리 장미를 의인화한 것 같은 여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자네트·”
자네트 프란츠·
그녀는 예선의 2등 통과조· ‘천축’에서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생도다·
이름을 불린 그녀가 생긋 웃었다·
“나를 안다니 영광이네· 토벌제 준비는 잘 되어가? 며칠 안 남았잖아·”
“딱히 준비랄 게 없다·”
“후후· 그래? 그런데 나는 유디트의 높은 명성을 누군가가 의심하게 될까 봐···· 그게 조금 걱정이야·”
허공에서 우리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너는 신분을 숨기고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잖아 토벌제가 끝날 때까지는 최대한 조용히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떠니?”
자네트는 더없이 친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미소가 스칼렛을 위한 것임을 나는 안다·
“아 물론 혼자 방에 있는 게 얼마나 심심한지는 나도 잘 이해하고 있어· 그 마음 알지·”
나는 천천히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키는 그렇게 큰 편이 아니지만 흘러나오는 기감이 훌륭할 정도로 탄탄한 면이 있었다·
“그러니까 정 심심해서 견디기 어려우면 내가 찾아가서 말 상대라도 해줄게· 마법사랑 대화하는 법은 모르지만 혼자보단 나을 거야·”
마치 갓난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태도· 자네트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진다·
시간이 남아돌았다면 비언어적인 반응이라도 해주었겠으나 현재의 나는 무척이나 바쁘다·
“우리 조금만 더 어른스럽게 행동하자· 적어도 스칼렛님께 민폐가 될만한 행동은···· 플란 내 말 듣고 있어?”
내가 대화에 집중하는 기색이 없자· 자네트가 한 번 되물었다·
“딱히·”
“후후· 그랬구나· 좋아· 한마디만 더 할게·”
자네트가 뭐라건 나는 이솔렛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모습이 어느샌가 없었다·
마녀의 마력을 감지하려 애썼다· 갈무리되지 못하고 사방으로 삐죽거리던 그 마력을·
그러나 그것이 감지되는 일은 없었다·
“토벌제가 끝나면 동시에 언론사의 비밀 서약이 끝나· 그땐 아카데미에서도 네가 유디트의 남자라는 걸 알게 될 거야· 그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한 번 고민해봐·”
와중에 자네트는 계속 말을 붙이는 중이다· 이솔렛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자 나도 모를 짜증이 치밀었다·
“네가 우승하면 득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천축은 우승을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자네트·”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조용히 속삭였다·
“사교회장에 짖는 애완견은 출입 불가다·”
“···?”
그녀가 내 말과 행동을 미처 이해하기도 전에 나는 다음 말을 이어갔다·
“스칼렛· 네 애완동물 도로 데려가지 그래·”
“···!”
그 한마디에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했다·
이 공간의 모두가 내가 자네트와 스칼렛을 취급하는 방식에 아주 매우 놀란 듯했다·
모두의 눈동자가 내게 꽂히고 이내 스칼렛의 눈동자도 천천히 나를 향했다·
스칼렛의 눈동자에서 분노가 잔불처럼 일렁이기 시작했지만 약속은 지켜지기 위해 존재하는 법·
그녀는 내가 무엇을 하든 관여할 수 없다·
오 초· 십 초· 영원할 것 같던 침묵의 끝에서·
“···와라· 그놈을 굳이 상대할 필요 없어·”
스칼렛은 자네트에게 짧게만 이야기했다· 덕분에 다른 이들의 얼굴이 더욱 볼만해졌다·
“····”
자네트는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스칼렛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스칼렛을 향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깔끔하게 물러난다·
“그리하겠습니다· 기사님·”
나 역시 다른 이들을 뒤로하고 떠났다· 2층도 조금 둘러보면서 이솔렛을 찾을 셈이다·
2층은 스칼렛의 눈이 없어서일까 도착하자 몇몇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아 몇 가지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면····”
“혹시 따로 약속을 잡을 수 있을지····”
다가오는 이들의 용건은 다양했다·
나에 관한 호기심도 있었고 청탁에 가까운 것도 있었지만···· 역시 아직은 스칼렛에 관한 질문이 가장 많았다·
그들 전부를 무시하며 나는 2층을 지나 인적이 드문 3층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로소 이솔렛을 발견했다·
“야옹~”
검은 고양이의 모습· 그러나 마녀 이솔렛임이 확실하다· 삐죽 새어 나오는 마력이 그 증거다·
그녀가 내 소매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이솔렛·”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이솔렛이 인간으로 변했다· 역시나였다·
“콜록 콜록! 에고 감동이에요· 이제는 저를 먼저 찾아주시기도 하고····”
“····”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피를 토하며 쓰러질 것 같은 신체와 더없이 강건한 마력· 두 요소에서 발생하는 차이점이 다소 흥미로웠다·
하지만 내 시선에 담긴 것이 분노라고 착각한 것인지· 이솔렛이 갑자기 손사래를 쳤다·
“쿨럭···! 으으 너무 화내지는 마세요· 제가 매달 금화도 보내드렸잖아요····”
나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다· 이솔렛이 창백한 얼굴로 기침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콜록 콜록! 스토킹 같은 게 아니에요· 그냥 순수하게 응원하는 마음이지···· 아마도·”
나는 그녀에게 손수건 하나를 내밀었다·
트릭시가 준 손수건을 건네려다 그냥 내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이솔렛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것을 받아든다·
“고마워요· 애초에 저는 점성술사잖아요?”
“점성술사·”
네 글자를 나지막이 읊조렸다·
점성술사라면 이전 세계에도 있었다· 각종 기묘한 도구를 활용하여 미래를 살핀다는 미신에 가까운 것을 행하는 이들이었다·
이솔렛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저는 미래를 볼 수 있으니까요···· 당신에게 투자할 뿐이에요· 나중에 성공해서 돌려주면 그걸로 충분···· 콜록 콜록!”
결국 단순한 이야기였다·
이솔렛은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성술사’이며 몸 주인의 미래를 본 이후 후원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내용·
그녀가 기침하며 다시 입술을 떼었다· 내가 건넨 손수건은 이미 피로 흥건하다·
“아카데미에서 활약하는 거 잘 지켜봤어요· 근데 고유 능력을 사용 안 하시고도 그 정도라니···· 정말 놀랐어요·”
“고유 능력?”
“네· 당신의 고유능력이요· 그거 앞으로도 안 쓸 거예요? 쿨럭 쿨럭···! 아이고 머리야····”
과연 기사의 핏줄을 지녔다는 것인가 이 몸에도 고유 능력이 있긴 한 모양이다·
“이솔렛·”
나는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네· 쿨럭 쿨럭···! 말씀하세요·”
“내게 후원한 총금액이 어떻게 되지·”
“십 이만개? 그 정도겠네요·”
한 달에 천 개씩 무려 십 년간을 후원했다는 셈인데· 그녀의 행동이 쉬이 납득하기 어렵다·
‘아니 어쩌면·’
이솔렛이 진정 미래를 본 것이라면 이건 우둔한 선택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탁월한 행동일 것이다·
“십이만개라 잘했다· 이솔렛·”
그러자 이솔렛의 기침 소리가 멎었다· 그녀가 두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잘했다고요?”
“그래·”
“어 음···· 오늘따라 평소랑 다르시네····”
이솔렛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는 문득 그녀의 ‘점성술’에 관하여 호기심이 동했다·
“이솔렛· 미래는 지금도 볼 수 있는건가·”
“콜록 콜록···! 그럼요· 볼 수 있죠·”
이솔렛이 내게 두 걸음 정도를 다가왔다·
“오늘은 칭찬도 받았으니 그냥 한 번 봐 드릴게요· 수정구가 없을 땐 눈동자로 보면 돼서·”
그녀의 시선이 내 눈동자로 향하고· 다음 순간 이솔렛이 선 채로 얼어붙었다·
내 눈동자 안을 자세히 살피려는 듯 이솔렛은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서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의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
“콜록! 콜록 콜···· 어····”
이솔렛의 기침이 멎었다·
정확히는 아예 호흡을 멈추었다·
“····”
이솔렛의 눈이 점차 크기를 키운다· 동시에 그녀의 입도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고개를 서서히 모로 꺾었고 창백하던 얼굴에는 어느 순간 핏기가 돌았다·
“으응····”
그녀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투자는 틀리지 않았다니까·”
그녀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나를 살핀다· 그러기를 한참 마침내 입술을 달싹였다·
“다음 달부터는 금화 이천개씩 후원할게요·”
“상관없다만 무엇을 보았는지 정도는 말해라·”
“후후후···· 쿨럭 쿨럭···!”
이솔렛은 기침을 연달아 내뱉으면서도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본인의 입술 위로 검지 손가락 하나를 올려보였다·
“미래를 보는 것만 점성술사의 일이에요· 말해주는 순간 미래가 어긋나버려서···· 네· 아시죠?”
“···하찮군·”
나는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마녀와 몸 주인 사이의 접점을 알아냈으니 이미 초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2층으로 내려가며 나는 조용히 시계를 살폈다·
어느덧 경매에 참여할 시간이 되었다·
‘금화 십이만개라·’
어떤 방식으로든 기꺼이 사용해줄 생각이다·
◈
마탑 호텔 객실의 밤·
방대한 양의 이론에 온종일 시달린 뒤 드디어 대표들에게도 수면을 위한 시간이 주어졌다·
“····”
하지만 트릭시는 여전히 깨어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복잡한 밤이었다·
“하·”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객실은 더없이 호화롭다·
넓은 공간은 한 명 한 명 따로 지낼 수 있도록 분리되어 있고 간식거리와 차는 언제든 접할 수 있도록 가득 구비되어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토록 넓기에 또 공허하다·
“이러지 말자· 이러지 말자·”
갑작스레 불면증이 찾아왔다· 예전에도 으레 한 번씩은 있었던 일이지만 오늘따라 특히 심하다·
토벌제를 향한 긴장일까 아니면 답장이 오지 않는 가르침 경매를 향한 기다림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큰일을 앞두고 마음은 조급해져 가는데 가르침 경매로부터 답장이 오질 않으니 답답하다·
트리비아를 펼쳤다·
[▷ 슬슬 만나면 어때용!]
[▷ 맞다· 저 예선 1등으로 통과했는데]
[▷ 혹시 보셨나용···· ㅎ3ㅎ]
여전히 답장은 없다·
트리비아를 다시 덮었다· 펼쳤다 덮었다 펼쳤다 덮었다···· 다섯 번 정도를 반복했다·
“···어·”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트릭시는 급하게 침대에서 벗어나 손수건 하나를 챙겨왔다· 플란에게 전달을 부탁했던 것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이 손수건은 지닌 자의 촉감과 향을 전달한다· 지금쯤이면 충분히 전달했겠지·
“흠흠·”
트릭시는 헛기침하며 주변을 살폈다·
이 공간에는 트릭시 혼자· 나머지는 다들 잠들어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정도면 안심이다·
트릭시는 다시 침대에 누워 손수건을 조용히 얼굴 쪽으로 가져다 댔다·
잠시 후·
“····”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의지해도 좋을 만큼 든든한 기운이 트릭시에게 전달되었다·
은은한 향이 소녀의 코끝을 간질였다·
트릭시는 비로소 눈을 감았다· 왜인지 진정이 되었다· 이제는 잠들 수 있을 것만 같다·
구름 떼처럼 생각이 천천히 흘러간다·
생각해보니까 베키는 왜 말해준다고 해놓고서 말을 안 할까· 공간이 나뉘어있으니 당장은 물을 수가 없다· 그래서 플란과 아고라 보드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냔 말이다· 내일 하루는 또 얼마나 힘들까· 모르겠고 가르침 씨가 보고 싶었다· 가르침 씨····
마구잡이로 흐르던 생각이 스르륵 끊기고·
새근새근─
어느 순간 소녀는 천사처럼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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