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
풋ㅡ!
베키는 저도 모르게 우유를 허공에 뿜었다·
사레가 들려 한참이나 괴로워하던 베키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것이 플란임을 확인한 후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 갑자기 뭐야!”
“길 좀 물을까 해서·”
“길?”
“학생이 운동은 어디에서 할 수 있는지 마법 스크롤을 비롯한 물품은 어디에서 구매할 수 있는지·”
“그걸 왜 굳이 나한테···”
“눈에 띄니까·”
베키는 잠시 곰곰이 생각했다·
‘눈에 띄었다···’
빵과 우유를 먹던 본인의 모습은 썩 초라했을 것 같다· 베키는 부끄러워져서 괜히 목소리를 키웠다·
“야 나도 바빠! 내일 테스트 준비해야해! 그런건 네가 직접 찾아!”
“···준비를 하느라 바쁘다라·”
플란이 모로 고개를 기울인다·
“테스트는 어차피 기량에 맡겨야하지 않나· 어떤걸로 평가하겠다는 안내조차 없는데·”
“뭐어?”
하지만 플란의 이야기를 들은 베키의 고개는 더더욱 크게 꺾인다·
“아니··· 플란 너 트리비아 안 해?”
“트리비아?”
“그래 트리비아·”
마법학부생 사이에서는 상식으로 통하는 트리비아를 모르는 플란이 베키는 의문스럽다· 이내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노트 한 권을 꺼낸다·
검은색으로 칠해진 그 노트 표지에는 마녀들이 타고다닐 것 같은 빗자루 하나가 그려져있었다·
“여기서 고학년들이 다 이야기 해주잖아·”
“음·”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플란은 그것을 받아살폈다·
공책이라는 것은 무릇 과거를 담기 위한 물건이다· 특정 시간대에 적힌 활자는 과거에 붙박이고 공책은 스스로가 사라지지 않는한 자신이 품은 기록을 있는 그대로 보존한다·
*졸업생 페이지
*정보 페이지
*경매 페이지
*비밀 페이지
*동아리 페이지
·
·
·
허나 플란이 건네받은 ‘트리비아’라는 이름의 공책은 다르다· 트리비아는 과거가 아닌 현재를 담고있었다·
페이지마다 각 분류에 어울리는 이야기들이 적혀있었으며 심지어 실시간으로 적혀있는 활자가 뒤바뀌었다·
“놀랍군· 이건 대륙 전역에서 사용 가능한건가·”
“당연히 아니지· 트리비아야말로 마법 학부의 상징인데· 마법 학부 공간 내에서만 효력을 발휘해·”
플란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아직은 이 정도가 고작인 듯 하지만 그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제법 흥미로웠다·
플란은 트리비아를 손 끝으로 문지르면서 그것 내부에 흐르는 마나와 감응했다·
“이 노트 자체가 하나의 수신기로군· 특정 회로를 가진 마나를 자신의 고유 신호로 추출하는 역할을 하고있어·”
조금만 손보면 마법학부 권역 밖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플란의 탐구심이 슬그머니 솟아올랐다·
“특정 회로를 가진 마··· 뭐라고? 아니 뭐라는거야 갑자기·”
허나 그러한 플란의 상념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베키 덕분에 깨어진다·
“됐다· 여튼 테스트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 있지·”
“여길 봐봐·”
베키가 ‘정보 페이지’ 부분을 눌렀다· 그러자 나타나는 수많은 게시물들· 진짜 유익해보이는 것이 있는가하면 교수를 향한 아주 심한 욕도 있었다·
플란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없었던게 다행이로군·”
이전 세계에 트리비아가 있었다면 플란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욕을 먹었을까· 쉽게 가늠이 되질 않는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다·”
“···뭐야· 아무튼 여기 봐봐·”
한편 베키의 손가락은 페이지 구석쪽에서 멈추었다·
“자 이거·”
[ 마법학부 새내기들 힘들겠네 ]
보니까 이번에 새내기들 담당 바이올렛이더라·
망했다고 봐야지· 그 교수는 머리에 학년이라는 개념이 없어· 어리다고 봐주는것도 없고·
근데 이 교수 첫 테스트는 늘 똑같다·
그냥 대뜸 나오게해서 제일 자신있는 마법 써보라고 시킨다· 우는 학생 매번 나오고·
그나마 위로해주자면 조작 계열을 좀 좋아해· 그쪽으로 준비해봐·
내용을 확인한 후 플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학생들 사이에서는 유용한 소통 공간이 되리라· 그러다 공책을 습관처럼 첫 페이지부터 끝페이지까지 촤르륵 넘겼다· 맨 마지막페이지에도 무언가 적혀있다·
[ 내가 기록한 게시글 ]
[ 귀족 새내기 코디 이렇게 하면 무난한가요 ]
ㄴ딱봐도 귀족인척하는 평민
ㄴ귀족 새내기 이런 단어를 누가 씀 새내기면 귀족이 기본값이지
베키가 공책을 곧바로 탁 빼앗아간다·
“야 야· 언제까지 보는거야· 자기건줄 알겠어·”
동시에 베키의 얼굴이 제 머리카락처럼 붉어졌다· 플란은 어떠한 말도 없다· 여전히 고뇌하는 중이었다·
그 침묵이 어색해서 베키는 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또한 트리비아의 한 페이지를 펼쳐서 아카데미 마법학부의 약도를 보여주었다·
“체력 단련은 여기· 물품 구입은 여기· 됐지·”
그리고는 손을 휘휘 젓는다·
“알았으면 이제 가 봐· 나 A등급 받아야해· 바빠·”
하지만 플란은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태연하게 물었다·
“반드시 A등급이라· 이유가 있나·”
“···넌 가끔 너무 당연한걸 신기하다는 듯이 묻는다?”
“한 번만 말해주면 된다· 그럼 똑바로 기억하니까·”
베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그야 혜택이 장난 아니잖아· 장학금은 기본이고 기숙사는 자동 등록에 아카데미 내부 편의 시설도 무료로 이용 가능해지는데·”
“나름 괜찮군·”
마침 플란도 가문 구성원들과 매일매일 신경전을 벌이는 것은 귀찮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시설이 나쁘지 않다면 같은 마법사들과 기숙사에서 지내는게 더 나은 환경일 터·
베키는 플란이 먼저 떠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자기쪽에서 떠날 채비를 했다·
“난 이제 가본다· 연구실 가봐야해·”
“연구실?”
플란이 눈썹을 한 차례 꿈틀거리며 되묻는다· 베키가 지금까지 봐온 플란의 반응중에서는 가장 격한 것이었다·
그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응 연구실· 연구실에서 연습하지 어디서 연습해·”
“나도 가지· 안내해·”
“네가 왜 같이가?”
“가고싶으니까·”
베키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플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플란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뭐니뭐니해도 그에게는 마법을 연구할 수 있는 장소가 가장 재미있었으니·
“내 개인 연구실이 아니야· 여러명이 함께 쓰는거라 전부에게 의견을 물어봐야 한다고·”
“물어보면 되겠군·”
베키의 조그만 입이 벌어졌다·
‘얘가 왜 이래? 곤란하게·’
플란의 제안이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연구실이 차마 연구실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허름한 공간이라는 점에 있었다·
기껏해봐야 평민 학생 몇 명이 허술한 장비 가지고 연구하는 곳인데 플란을 데려가기엔 너무 창피했다·
그때 플란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물론 상응하는 보상은 해주지·”
“보상?”
“A등급을 목표한다면서·”
“뭐?”
“그럼 준비한 마법이 있을거 아닌가· 네게 있어서 가장 자신있는 마법·”
“그야··· 있긴 하지· 왜·”
플란이 한 걸음 다가왔다·
눈썹 아래까지 내려오는 앞머리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순간 같은 학생이 아니라 웬 교수가 다가오는 것 같아서 베키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여유가 되면 검토해주지·”
플란의 여유로운 태도·
일 초· 이 초· 삼 초· 잠깐의 정적 후 서로가 같은 새내기라는 것을 뒤늦게 인지한 베키가 발끈했다·
“누가 너한테 검토맡긴대? 진짜 어이없어·”
“물론 선택은 자유지·”
이 기회를 놓치면 너만 손해라는 듯한 태도· 그 오만함에 베키는 반발했다·
“너··· 너 그래· 생각해보니까 A 등급도 아니라며· 뭘 검토해준다는거야·”
“등급···”
플란은 여전히 여유롭다·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래 확실히 A는 아니지·”
“난 A거든···!”
A도 못받은 주제에 무슨 훈수를 두겠다는건지· 베키보다 등급도 낮은 주제에 당당하게 나오는 그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추가로 무언가를 쏘아붙이고 싶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소년의 투명한 붉은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가 일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는 사이 그 강렬함에 압도당했다·
또한 베키의 머리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규격 외 등급···?’
트리비아를 통해 그런 등급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다·
최상위 등급인 A보다도 높게 분류되며 아카데미 내외부의 스카우팅 관계자들의 최우선 목표가 된다는 규격 외 등급·
흠흠 베키가 헛기침을 했다·
“플란 너··· 무슨 등급인데?”
당사자는 여전히 미소를 띄고있다·
“들으면 아주 크게 놀랄 텐데·”
“아주 크게 놀라?”
베키가 되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플란의 여유로운 표정이 유일한 대답이라면 대답이었다·
‘진짜인가?’
베키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뭐· 대신 가서 이상한 짓 하면 안 된다·”
“안 한다고 약속하지·”
“···그리고 검토도 꼭 해줘야돼·”
“여유가 되면·”
결국 베키를 따라 나란히 걷기 시작한 둘·
한동안 말없이 걷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베키가 자신의 소매 향을 맡았다· 그러더니 플란을 향해서 자신의 한 쪽 팔을 내민다·
“이거 향 많이 이상해?”
플란은 1초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징그럽군·”
◈
“이상하다? 분명 이론대로 했는데···”
“아니지 아니지 지금 전혀 다른 이론을 적용시킨게 문제잖아·”
플란이 베키를 따라 도착한 연구실은 정돈되어있지는 않지만 생기만큼은 넘치는 장소였다·
서투르지만 젊음 열정 등등은 가득하다· 오히려 서투르기에 피어오를 수 있는 특유의 감성들이 존재했다·
“······”
연구실 구성원은 베키와 플란을 제외하면 평민 여학생 두 명이 전부였는데· 플란을 보더니 갑자기 연구를 멈추었다·
그리고 그 중 한명이 베키를 확 끌어당겼다·
“남자친구야?”
질문하는 두 명의 눈빛은 반짝거렸고 질문을 들은 당사자는 눈을 휘둥그레떴다·
“미쳤어? 그게 무슨 소리야·”
“아 하긴 네가 귀족 남자친구를 만들었을 리는 없지·”
주황색 머리카락과 주근깨가 인상적인 소녀· 티르가 은근히 안도했다· 베키는 고개를 저었다·
“귀족도 아니고 남자친구도 아니야·”
“아··· 그래? 귀족이 아니라고?”
플란이 베키의 남자친구가 아니라는 말에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는데 귀족이 아니라는 말에는 다들 꽤나 크게 동요한다·
베키를 제외한 두 명이 플란을 물끄러미 살핀다·
높은 콧대 새하얀 피부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들어 잔뜩 찌푸린 표정은 도저히 평민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보잘것 없는 이 공간을 그 한 명이 고급진 공간으로 바꾸고 있었다·
‘평민이 저럴 수가 있나?’
그가 미간을 좁히고 있으니 오히려 이쪽에서 눈치가 보일 지경이다·
“야· 넌 이름이 뭐야?”
남색 단발머리· 린느가 대뜸 물었다·
한참 어린애를 대하는 듯한 태도라서 플란은 조금 불쾌했다·
“여기 베키 말고는 다 고학년이야· 뭐 일단 우리 새내기는 무슨 볼일이 있어서 왔어?”
“흐음·”
“여기 노는 공간은 아니거든· 혹시 베키한테 관심 있는거면 다른 날에 다시 와·”
그러거나말거나 플란의 시선은 그녀의 손에 꽂혀있었다·
짧게 깎은 손톱 그러나 그을려있지는 않다· 베키가 나서서 플란은 그런 이유로 온 게 아니라고 둘러대려 하는데 플란의 말이 더 빨랐다·
“파괴 계열을 전공했나·”
“뭐?”
“폭발은 안 다루는 건가 다루지 못하는건가· 손끝이 그을려있지를 않아서·”
“그건···· 아직 안 다루는 거지·”
린느가 말을 흐리며 은근슬쩍 뒷짐을 졌다·
“연구실은 총 세 명이서 사용하는가·”
베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플란은 미간을 살짝 좁히고서 연구실 여기저기를 살핀다· 시꺼멓고 검게 눌러붙어있는 플라스크 검지로 스윽 훑자 손에 잔뜩 달라붙는 먼지·
플란은 먼지를 후 불어버린 후 읊조렸다·
“너무 형편없는데·”
“아 저기 저기 그러니까·”
다행히 베키는 눈치가 빨랐다· 양 손바닥을 내보이며 플란과 린느 사이로 끼어들었다·
“내일 마법학부 새내기들 등급 테스트가 있거든요· 제 거 봐준다고해서 데려왔어요· 그것만 보고 금방 나갈거에요·”
하지만 린느의 표정도 이미 좋지는 않았다·
“누가 누굴봐줘· 베키 네가 쟤걸?”
“아뇨· 플란이 제것을요·”
“쟤가··· 네걸?”
린느의 날카로운 시선이 베키를 위아래로 훑는다·
“네건 내가 충분히 봐주지 않았어?”
“아 그러니까· 언니를 못믿는게 절대 아니라요· 새내기들끼리도 좀 맞춰봐야하지 않나 해서···”
이거 큰일났는데· 중재하려고 나섰으나 괜히 린느의 심기만 건드려버렸다·
차갑게 식어버린 린느의 태도가 베키에게는 무섭기만하다· 어느샌가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봐주겠다고 먼저 제안한 것은 이쪽이다·”
그런데 그 때 플란이 담담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베키가 창백해진 얼굴로 뒤돌아 플란을 향해 입모양으로 말했다·
가· 만· 있· 어·
하지만 린느도 플란도 이미 베키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책상에 앉은 린느가 다리를 꼬았다·
“베키 마법도 봐준다고하고· 연구실까지 쫓아오고· 베키한테 관심있어서 허세부리는 걸로밖에 안보이는데 난·”
“허세?”
“그래 그리고 남들이 쓰는 연구실을 무작정 비판하는건 좀 무책임하지·”
린느는 화를 꾹 억누르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넌 뭐 얼마나 잘하길래 그래? 관심있는 여자애한테 잘보이고싶으면 근거가 있어야지·”
린느가 뚜벅뚜벅 걸어서 베키를 제치고 마침내 플란의 코앞까지 다가와 섰다·
“···베키는 이미 내가 봐줬어· 네가 더 잘 봐줄 자신있어?”
“베키 역량에 따라 다르겠지· 그래도 자신없지는 않군·”
하 코웃음 친 린느의 시선이 베키쪽으로 향한다·
“해봐· 베키·”
“네? 뭘···”
“내일 테스트에서 쓸 마법 해보라고· 내가 알려준대로·”
“아··· 네 네·”
베키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이내 연구실 안에서 베키의 마나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