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2
“너무 힘 빼지 마라·”
플란이 쯧 혀를 차며 반쯤 돌아섰다· 베키는 나름대로 억울한 구석이 있어 항변했다·
“아니 아니· 힘 뺀 적 없어···!”
“적당히 즐기는 정도였나· 여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자 하도록·”
“····”
그러나 베키의 말은 닿지 않는다·
이상야릇한 그림을 보며 힘을 뺀 마법사가 되어버린 베키는 입만 벙긋버렸다· 살면서 수치와 굴욕을 겪은 순간은 많았지만 이 정도는 난생처음이었다·
“애초에 시간 낭비라는 것만 알아라· 본다고 도움이나 되겠나· 실전과의 괴리가 꽤 클 텐데·”
“···아·”
종잇장처럼 팔랑거리던 베키는 결국 주저앉았다· 크나큰 충격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그 말을 끝으로 플란은 떠나갔다· 거실처럼 넓은 공간에 남은 것은 오로지 베키 혼자였다·
“····”
플란의 머릿속에 이제 베키는 ‘이상한 것에 관심이 많은 여학생 1’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살면서 경험해본 적 없었던 여러 가지 충격에 휩쓸려있는 사이 이번에는 다른 방향의 문이 열렸다·
베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잠에서 이제 막 깨어난 듯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살짝 부은 얼굴· 셔츠 한 장으로는 도저히 가려지지 않는 육체의 굴곡· 트릭시였다·
베키는 해탈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방금 얼마나 큰일이 있었는지 트릭시는 모르겠지·
“일어났니·”
“뭐·”
트릭시는 평소처럼 냉담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푸른 소녀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고 셔츠의 단추를 하나둘 잠그다가 문득 베키가 들고 있는 책으로 시선을 향했다·
“····”
단추를 잠그던 트릭시의 손가락이 우뚝 멈추었다· 이내 베키의 품에 있던 책이 휙 떠올라 트릭시에 안착한다·
“너 너· 뭐야· 왜 이런 책에 손을 대·”
트릭시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베키는 이미 타인을 상대할 여력조차 없었다·
“네 책이잖아····”
“내 책 아니거든?”
“방금 보지도 않고 ‘이런 책’이라고 말했잖아·”
“무슨····”
트릭시는 얼굴이 화악 붉어져서 제멋대로 이 단어 저 단어를 꿍얼거렸다·
“토 달지 마· 그리고 이건 압수야· 내가···· 직접 주인을 찾아서 돌려줄 테니까· 그렇게 알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트릭시는 문을 닫았다·
“에휴·”
베키는 여전히 주저앉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니 역시 화가 나서·
“···!”
곧바로 달려가서 잠긴 문고리를 뒤흔들었다·
“아니 야! 내가 너 때문에─!”
◈
마탑 객실의 복도로 나온 직후 나는 의외의 인물을 마주치게 되었다·
금발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소녀· 헤일리 루미안· 그녀를 이렇게 마주치는 것도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안녕 플란·”
헤일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손에는 웬 바구니가 들려있는 채였다·
나름대로 밝게 웃어 보이는데 헤일리의 얼굴은 예전에 비해 확연하게 초췌해져 있었다· 나는 대충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결국 마법 학부가 1등으로 본선 진출이네· 정말 잘됐다·”
헤일리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냥 루이스한테 뭐 좀 전해주려고 온 거야· 근데 이왕 마주친 김에 너한테 축하한다는 말도 해주고 싶어서·”
그렇게 덧붙이며 제법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와닿지 않는 미소였고 와닿지 않는 축하였다·
그런데 그때·
“아 플란 학생!”
메르헨 일보 마법 학부 편집부의 부장 세피아가 복도 저편에서 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다가온다·
옆에는 오드리 교수도 함께였다· 우선 무슨 일인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에 비해 세피아의 얼굴은 무척이나 밝고 상쾌했다·
“스캔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사 학부에서 전부 내렸어요· 이걸로 한숨 돌렸네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급히 왔나 싶었는데 결국 스캔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기사 학부 편집부 부장· 일라이자와 명함을 주고받으며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게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후우 사실 걱정되는 부분도 꽤 있었거든요· 플란 학생이야 내가 철석같이 믿지만 여학생들 입장은 나름 애매모호한 구석도 있었어서·”
세피아가 신나서 말을 이어간다·
“아무튼 결국 쓸데없는 걱정이었네요~ 플란 학생과 관련된 일은 수상할 정도로 결과가 좋단 말이야· 트리비아에 떠도는 소문대로 진짜 말하는 그대로 이루어지나?”
“실제로 영창의 원리가 그러하지·”
“아이고 꼭 이럴 때도 마법 이야기를 하신다·”
세피아가 혀를 내두르면서 씨익 웃는다· 동시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뭐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솔직히 여학생들 입장에선 아쉬운 상황일 수도 있어요· 스캔들을 기회 삼아 플란 학생의 곁에 딱 붙을 기회였는····”
세피아가 헛숨을 삼켰다·
곁에 서 있던 헤일리의 표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세피아는 괜히 헛기침했다·
“흠흠 다른 학생도 있는데 제가 말이 길었네요· 아무튼 오보는 전부 정정됐다는 게 결론이에요· 안심해도 좋습니다!”
드디어 다 말했나· 이제 그만 상대해도 괜찮은 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저기 플란 학생~”
이번에는 오드리 교수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여전히 정장을 입고 금발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어 올린 채였다·
세피아와 마찬가지로 오드리 역시 할 말이 대단히 많은 듯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추측하던 와중 제법 예상과는 다른 이름이 튀어나왔다·
“바이올렛 교수가 연구실 얘기했었다면서요?”
바이올렛·
조금 생각한 후에야 바이올렛이 내게 연구실을 빌려주려 했었다는 사이 떠올랐다·
“예· 결국 마탑의 객실로 했습니다·”
“네네· 그래서인지 먹을 거나 책 같은 거라도 좀 챙겨주고 싶었나 봐요· 당사자는 현재 회의 중이라 제가 왔어요·”
“괜찮습니다·”
“기분 좋게 받는 척이라도 해줘요· 플란 학생을 굉장히· 아주 굉장히 좋게 생각하는 모양이라서요·”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데 오드리의 시선이 문득 옆에 서 있던 헤일리에게 닿았다·
헤일리가 뒤늦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드리 교수는 밋밋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예쁘네· 플란 학생한테 선물 주려고요?”
“···네?”
헤일리가 멈칫하며 되물었다· 그러나 오드리의 시선은 이미 세피아에게 향해있었다·
“요새 편집부 바쁘죠? 일도 일인데 플란 학생한테 마구잡이로 가는 거 치우느라·”
오드리가 그다음엔 내게 말했다·
“여자 조심해요· 스캔들 잦아든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다가 또 스캔들 날라· 이제는 선배까지 몰고 다니네·”
어색하게 웃고 있던 헤일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딱딱해졌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어쩌지도 못할 만큼 시들어 있었다·
“헤일리에요· 선배 아니고 동기예요·”
“아 1학년?”
“네· A등급이요· 테스트 때 저 보셨었는데····”
오드리의 표정이 조금 머쓱해진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오묘한 얼굴로 헤일리를 살펴보다가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미안해요· 제가 2학년 담당이기도 하고 1학년이라면 플란 학생밖에 안 떠올라서····”
“으이구 전달 끝났으면 이리 와요· 플란 학생! 우리 가볼게요!”
세피아가 오드리를 데리고 유유히 사라졌다·
생각해보면 새삼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카데미에 처음 입학했을 때와 비교해본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나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 헤일리에게 말했다·
“너는 안 가는 건가·”
“안 가냐고? 지금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본인 나름대로는 평소처럼 친절하게 대답한다고 한 것 같다만 이미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목소리에 묻어있었다· 표정 관리가 전혀 되지 않고 있는 것은 두 번 말 해봐야 입만 아프다·
“우두커니 서있는 건 너 뿐이지·”
“···직접 건네줄 거야· 걱정해줘서 고마워·”
헤일리는 금세 표정 관리를 했다· 이를 악물었는지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이내 그것 조차도 자취를 감춘다·
또각또각·
그런데 이번에는 굽 높은 구두 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돌아보니 총장의 비서가 내게 시선을 꽂은 채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직후 그녀가 옅게 웃는다·
“얼굴 참 보기 힘든 플란 학생 드디어 보네요·”
“무슨 일로·”
“당연히 총장님의 말씀 전달입니다·”
그녀가 내게 종이 몇 장을 건네준다·
몇몇 교수들의 명단 시간 장소···· 이해가 어렵지 않았다· 참관 계획서였다·
“보시다시피 참관 계획서입니다· 저희가 플란 학생을 향해 가지는 관심은 이제 플란 학생의 능력만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국한되지 않는다라·”
“예· 플란 학생이 대표 학생들을 과연 얼마나 성장시키는가···· 총장님께서는 그것 또한 눈여겨보고 계십니다· 훈련하는 모습을 저희도 최종적으로 한 번 볼 수 있으면 하는데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을 할 뿐이니 누군가가 훈련 과정을 살펴보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을 터·
수락받은 비서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그녀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총장님께 전부 들었습니다· ‘마녀의 숲’ 무제한 이용권을 받으셨다고····”
마녀의 숲· 옷과 장신구를 취급한다며 총장 코네트가 꼭 가보라고 추천했던 가게·
듣고 나서야 기억이 났다· 아직 여유가 없어서 방문하지는 못했다만 비서의 말은 사실이다·
“또 완드도 약속하셨으며 토벌제 우승 시에는 전담반도 꾸려지던데 응원하겠습니다·”
그녀는 안경을 밀어 올렸다·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눈꼬리가 호선을 긋고 있었다·
“마법 학부에서 전혀 유례없던 일이라는 것만 알아주시길· 총장님께서 학생을 이렇게까지 애호했던 적 정말 처음입니다· 물론 당신같은 학생도 처음이긴 하지만····”
말이 길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는지 적당한 선에서 비서는 스스로 말을 끊었다·
“여튼 아침 맛있게 드시고 훈련장에서 뵙겠습니다· 저희도 곧바로 참관 준비할게요·”
비서가 떠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헤일리는 바구니를 든 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어떠한지·
나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
마틴은 오늘도 그냥 노는 중이다·
토벌제 본선이 코앞인 지금 들떠있는 학부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매일같이 무리와 놀고 마셨다·
“마틴 오늘 밤에도 마실 거지?”
“당연히 그래야지· 인원수 맞춰봐·”
요즘 마법 학부 마법사들의 얼굴들이 밝았다·
이러한 점은 굳이 얼굴을 보지 않고 트리비아만 펼쳐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게시글 하나하나에서 다들 상당히 설레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어라·”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 마틴의 눈에 띄었다·
누군가가 분홍색 머리칼을 로브로 애써 가린 채 걷고 있었다· 마틴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의 뒤로 따라붙었다·
“아리아?”
마틴의 호명에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의 고개가 마틴을 향해 어색하게 돌았다·
“···마틴?”
“맞네· 진짜 너였냐· 언제 퇴원했어?”
“지금 막·”
아리아 폰타인·
플란과 과제 진행 도중 극독 스크롤을 뒤집어썼고 그로 인해서 치료소 신세를 지게 된 녀석·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나인 거 어떻게 알았는데·”
“로브 밖으로 머리카락 다 삐져나왔어 인마·”
“····”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듯 아리아는 괜히 로브를 조금 더 꾹꾹 잡아당겨 뒤집어썼다·
아리아는 그러면서 마틴의 모습을 살폈다· 이내 입술 자국이 남은 마틴의 목덜미에 그녀의 시선이 닿았다·
“여전히 여자나 밝히나 보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애초에 더 좋은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아카데미에 입학했어·”
“···그 촌스러운 명함은 또 뭐고·”
원래 흰색이어야 할 마틴의 명함은 현재 야광 빛을 살짝 머금고 있었다·
“아 이거?”
마틴이 검지로 제 명함을 가리켰다·
“유시아가 해줬어· 애들 전부한테·”
“유시아···· 그건 또 뭐 하는 년이야· 지금 만나는 여자친구 이름이냐·”
“넌 말해줘도 몰라· 네가 치료소에 눕고 나서 편입한 녀석이라·”
아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얼굴은 예쁘냐? 예쁘겠지· 이런 쓰레기를 자랑스레 달고 다니는 거 보면·”
“얼굴이야 마음에 들지· 그냥 드는 수준이 아니지· 아~주 마음에 들지·”
“목덜미에 자국도 걔 작품이냐· 좀 가려라·”
“야·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마틴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그런 여자애들은 죽을 때까지 제 주인만 쫓아다녀· 강아지 같은 거지·”
“개새끼 하나 못 꼬시냐· 쯧·”
“내가 주인이 아닌 걸 어쩌겠냐?”
이번에는 마틴이 아리아의 모습을 살폈다· 그녀는 품에 무언가를 꼭 안은 채였다·
“아리아· 근데 그건 뭐냐·”
“뭐 이거? 뭐긴 뭐야·”
아리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종이가 살짝 구겨진다·
“플란· 그 새끼 약점·”
“걔가 약점이랄 게 있나···?”
“당연히 있지· 시험 도중 맞붙으면서 내가 관찰했던 거 그거 전부 적었어·”
“음····”
그거 전혀 쓸모없을 것 같은데·
마틴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가까스로 삼켜냈다· 일단은 아리아의 표정이 워낙 진지했으니까·
대신 다르게 물었다·
“그래서 갑자기 약점은 왜 적었는데?”
마틴의 질문에 아리아가 눈을 부릅떴다·
“플란 얘 검마태제 대표로 나간다며·”
“치료소에서 소식 접했어?”
“의식이 돌아온 다음 접했지· 신문으로·”
그녀는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이반한테 플란 약점을 직접 제보해서 아주 참패를 당하게 할 거야·”
“···아이반?”
“그래· 기사 학부 1학년 대표· 아이반·”
“···?”
마틴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갑자기 웬 아이반? 걔한테 그걸 왜 줘?”
“검마태제 1종목· 전투· 기사 학부 대표가 아이반이니까· 이 병신아·”
“아리아· 그거 끝났어·”
“그래 이미 끝난 셈이긴 하지· 플란이 아이반을 어떻게 이긴다고···· 결과가 뻔한 건 나도 알아·”
아리아가 이를 까드득 갈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제보할 거야· 플란 그놈이 아주 참패를 당해야만 내 기분이 풀릴 것 같아서·”
“오···· 그렇구나·”
“비켜· 나 바쁘니까·”
아리아가 휙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마틴은 그녀의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픽 웃음을 터뜨렸다·
“야· 아리아!”
한 손을 번쩍 들어 양쪽으로 흔들다·
“나중에 꼭 후기 들려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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