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8
우리는 승리했다·
선로 위에는 시체라기에도 모호한 잔해들이 잔뜩 널브러진 채였다· 무슨 마차에 짓이겨진 과일 바구니처럼 육신의 내용물이 형편없는 몰골로 방치되어 있다·
“후····”
트릭시가 이마에 맺힌 땀을 훑어낸다· 뒤늦게 긴장이 풀렸는지 베키는 아예 주저앉아버렸다·
“아으으···· 높은 거 잔인한 거 여긴 내가 싫어하는 것만 잔뜩 있네····”
“싫어하는 것만 있는 건 아니지 않아?”
루이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곧이어 베키의 시선도 자연스레 나에게 닿는다·
별안간 베키가 얼굴을 붉히더니 제 고깔모자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다 싫은 게 아니고·”
대표들이 너나할 것 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들의 몸은 여전히 옅게 떨리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유령을 처치했다고는 하지만 인간을 죽인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감상을 느끼고 있을 터이니·
“잘했다·”
나는 낮게 칭찬을 읊조렸다·
그들은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유령들을 물리쳤으며 인간의 외형을 가진을 상대로 망설이는 기색 또한 많이 줄었다·
그때 다른 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해보니 갑옷을 걸친 용병 한 명이 기자들에게 인사를 받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자줏빛 머리카락과 함께 흩날리는 강렬한 기운· 신비의 협곡 단장 엘리시스였다·
엘리시스가 꼬리칸에 있던 기자들을 직접 지면으로 내려준 모양이었다· 이들은 내가 곁에 있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하던 대화를 이어나갔다·
“엄청났다?”
“네· 아 유령들의 규모를 말하는 게 아니고···· 마법 학부 대표들이 엄청났다는 말이에요·”
기자 중에서 아리네가 대표로 답했다· 주변에 널브러진 유령들의 잔해를 살펴보더니 엘리시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너희는 그동안 위에서 뭐 했어?”
“대표들의 모습을 수정구로 담았죠·”
“흐음·”
“근데 저도 기자이기 이전에 마법사거든요· 이 정도면 운용이 말도 안 되는 거에요· 정말 놀라운 수준의····”
“그래· 알아· 나도 안다고·”
아리네의 말을 툭 잘라낸 뒤 엘리시스의 시선이 이번에는 기차의 꼬리칸으로 향했다· 하늘을 향해 쭉 뻗어있는 그 귀빈 전용 칸으로·
다음 순간 엘리시스는 내게 물었다·
“어이 오랜만이다· 이거 정말로 네가 세웠냐?”
단장이 기차탑을 주먹으로 퉁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대단한 놈일세·”
엘리시스는 작게 중얼거리면서 씨익 웃었다· 만족스러움이 가득 담겨있는 미소였다·
“덕분에 마법 학부 대표들은 멀쩡하고····”
단장이 아리네에게 물었다·
“기자들은? 기자들도 사망자 없지?”
“네· 한 명도 없어요·”
아리네가 나를 몇 번 힐끔거린다·
“폭발에 꼼짝없이 휘말리나 했는데···· 플란이 기차를 세워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어요·”
“좋아· 사망자는 없고·”
단장이 턱으로 아리네의 수정구를 가리켰다·
“그거 지금 우리 모습도 담고 있는 거야?”
“네? 아뇨· 주기적으로 마나를 채워줘야하는 물건이라···· 중간에 수명을 다해버렸어요· 그래도 유령을 잡는 모습까지는 전부 담았─”
“그만· 물어본 것까지만 대답하고·”
“아 네·”
그렇게 정적이 흐르고 엘리시스의 시선은 다시 기차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길이 한동안 떨어지지 않는다·
“···흠·”
엘리시스는 나와 기차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할 말이 많은 듯한 얼굴을 하고서 무언가를 쉴새없이 고민했다·
결국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아리네였다· 그녀가 내게로 한 걸음 다가온다·
“저기 걱정하지 말아요· 대표들이 유령을 처치하는 모습까지는 우리가 확실히 담았어요·”
“너희는 잊은 게 있을 텐데·”
나는 그녀에게 송환석 세 개를 돌려주었다· 아리네의 눈이 한 박자 늦게 휘둥그레졌다·
“내 정신좀 봐· 송환석도 깜빡했네! 나도 모르게 정신이 팔려서····”
나는 대표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에 목적이 있었을 뿐이다· 바꾸어 말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의 기자들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아리네는 여전히 들떠있다· 신분을 숨길 생각 따위는 진즉에 버린 듯 했다·
“기차의 모습을 좀 더 확실하게 담았어야 하는데···· 혼자서 보기에는 너무 아깝단 말이죠· 아 마나를 채워와서 다시 담는다면─”
“필요 없다·”
내 마나는 무한하지 않다·
물체를 실시간으로 붙잡고있는 것이 아니기에 지금의 기차는 그저 세워져있을 뿐이다· 즉 얼마 지나지 않아 절벽 아래로 처박힐 것이다·
나는 엘리시스에게 물었다·
“토벌제 본선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상념에 젖어있던 엘리시스는 나를 바라보더니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놈 봐라· 이제는 아예 반말하기로 작정을 한 거냐? 본선까지는 한 5시간 남았다·”
“5시간이라·”
그 정도면 만족스럽다· 목적지까지 무리 없이 도착할 수 있을 터·
엘리시스가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 물었다·
“플란· 신비의 협곡으로 들어올 생각은? 장소가 이렇긴 해도 제법 진지한 이야기야·”
“여전히 없다·”
“그러냐·”
그녀는 한동안 빙글빙글 웃더니 어느 순간 턱으로 선로를 가리켰다·
“일단 역으로 돌아가면서 이야기하자· 보다시피 선로가 이래서 어차피 여기로는 못 가·”
나는 부서진 선로를 물끄러미 살폈다·
완전히 박살이 난 상태지만 ‘길이’로만 따진다 그렇게 길지는 않다· 자재만 있다면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다·
“자재 전달을 부탁하지·”
“자재? 자재는 갑자기 왜·”
엘리시스가 눈을 깜빡였다·
“···설마·”
“선로를 고쳐서 지나갈 생각이다·”
“아이고 이놈아·”
엘리시스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그럴 능력이 된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라· 이 선로는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위험해· 그래서 다른 역으로 가자는 거 아니냐·”
“위험하기에 나는 고쳐서 가겠다고 한 것이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허 진짜로 대단한 놈일세·”
눈을 미묘하게 뜨고 날 쳐다보더니 엘리시스는 결국 수긍했다· 그녀가 뒤에서 대기하는 용병들을 향해 소리친다·
“됐어· 호송 준비는 하지 마라· 안 돌아간댄다·”
“예· 알겠습니다!”
“대신에 자재들 좀 가져와· 선로 고치게·”
“예!”
단장의 몇 마디에 용병들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해진다· 엘리시스는 자줏빛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쓸어 넘겼다·
“어이 플란·”
그녀가 또 한 번 나의 이름을 부른다·
“한 번만 더 이야기하는데 신비의 협곡도 한 번 생각해봐라· 괜찮은 자리 하나 만들 테니까·”
“그게 단장 자리가 아니라면···· 그만 둬라·”
“단장 자리는 안 되지 이 놈아·”
엘리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베르켈에서는 조심하고· 우리 애들이 한솥밥 안 먹는 사람들한테는 좀 거칠어·”
“천축을 말하는 건가·”
“그래·”
그걸 듣자마자 헛웃음이 새었다· 도대체 누구더라 무엇을 조심하라는 건지·
“경고는 천축에게 해주지 그래·”
“음?”
“우리 애들이 방금까지 실컷 인간형 마수를 잡은 참이라 유령과 인간을 헷갈릴지도 모르겠군·”
엘리시스가 헛웃음을 삼키는 사이 옆에서 베키가 놀란 고양이처럼 튀어올랐다·
“프 플란! 난 사람은 못죽여!”
소녀는 혼자서 열띤 설명을 이어갔다·
“유령은 결국 마수니까 처치한거지···· 사 사람을 어떻게 죽여! 난 그런거 못해!”
“할 수 있다·”
트릭시와 루이스의 눈동자도 휘둥그레진 채였다· 베키가 그들을 검지로 가리켰다·
“못 해! 트릭시랑 루이스도 나랑 똑같은 생각일 걸? 표정을 봐· 다들 나랑 비슷하잖아· 애들아 그렇지?”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어색한 적막이 내려앉고 베키가 막 머쓱해하기 시작했을 때쯤·
“너· 방금 ‘우리’라고 말했어?”
“우와···· 플란 그렇게 말해준 건 처음이네·”
트릭시와 루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던 이유가 비로소 밝혀졌다· 베키도 그제서야 엇 하는 소리를 내며 새삼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다·
“그 그 그러네? 방금 분명 우리 애들이라고····”
“시끄럽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일축했다· 아닌 게 아니라 딱히 무언가 의미를 담아서 ‘우리’라고 칭한 게 아니었으므로·
엘리시스가 이번에는 루이스를 불렀다·
“여 루이스·”
“엘리시스님· 오랜만에 뵙네요·”
루이스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고생이 많다? 잘 자라서 신비의 협곡으로 와·”
“아 그게····”
루이스는 대답을 잇지 못하고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
잠시 후 엘리시스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뭐냐 그 반응은? 나 플란한테 너 뺏긴 거냐?”
“아하하···· 그런 건 아니고 플란한테서 제가 배우는 게 많아서요· 당분간은 옆에 있고 싶어요·”
“그래· 남은 이야기는 토벌제 끝나면 해·”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고 나는 마나를 갈무리하며 자재들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저기 저기요····”
한데 기자 한 명이 내게 말을 붙여왔다· 그녀의 손에는 메모지와 펜이 하나씩 들려있는 채였다·
“혹시 사인 같은 거 미리 받아둘 수 있을까요?”
기자의 한 마디에 곁에 있던 마법 학부 대표들이 나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오~ 플란 이제 정말 유명인사라니까·”
“···나도 받아둘까·”
“넌 논문 요약해가면 받잖아·”
“아이씨· 그런 거 말고·”
나는 조용히 메모지를 받아들었다·
나는 빠르게 서명을 적어냈다· 그리고 그녀에게 수첩을 돌려주려고 하였으나·
“아 옆에 제 이름도 부탁드립니다·”
내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귀찮음이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확 차오른다·
“···이름·”
“아 저는 로렐리아에요·”
어렵지 않게 적어냈다·
“철자는 이게 맞겠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실제로 보니 엄청 대단하네요· 마법사치고 이 정도의 위력을 보일 수 있다는 게····”
치고·
치고·
치고····
나는 사인 위로 두 줄을 그었다·
“넌 자격이 없다·”
◈
“아이고! 잔불의 기사님 오셨습니까!”
기차에서 내린 직후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스칼렛을 환대했다· 베르켈의 촌장 케니스였다·
그는 잔불의 기사를 맞이하는 데에 직접 두 발 벗고 나섰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오는 길 불편하진 않으셨습니까?”
스칼렛은 그에게 시선을 한 번 줄 뿐이었다·
“그럭저럭·”
스칼렛은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준비된 기차에 탑승한 채로 이곳까지 왔다· 귀빈들의 귀빈이라는 표현이 정말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하하· 언제라도 불편한 게 생기신다면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잔불의 기사님을 위해서라면 제가 무엇인들 못 하겠습니까?”
이외에도 촌장 옆의 인물들이 스칼렛에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잔불의 기사님을 뵙습니다· 해마다 하는 토벌제가 베르켈의 마수 처치에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그 행렬은 이어졌다· 촌장 촌장의 딸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누군가···· 스칼렛은 그들 모두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들아· 인사는 그쯤 적당히 하고···· 잔불의 기사님 귀찮으시라!”
촌장이 그들을 제지한 후 스칼렛을 향해 환히 웃어보였다·
“대표들과 주민들이 함께 모인 광장으로 가시지요· 기사님의 모습을 보면 모두 말도 안 되게 기뻐할 겁니다·”
“그러지·”
스칼렛은 촌장과 함께 걸었고 그 뒤를 다른 이들이 줄줄이 뒤따랐다·
그렇게 도착한 광장· 모여있는 대표들과 주민들이 눈을 반짝이며 스칼렛을 맞이했다·
“····”
아니 원래라면 그랬어야 할 터이나·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뭐야?”
“유령을 저렇게 쉽게 쓰러트려?”
“벌써 점수가 저 정도인데·”
활기차게 떠드는 주민과 대표들· 그러나 그 관심사는 스칼렛을 향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다들 그녀가 도착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
스칼렛은 본인의 시야를 의심했다·
옆에 있던 촌장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그가 다급하게 담당자를 찾아내서는 묻는다·
“이 이보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아이씨 한창 집중해서 보고 있는데·”
담당자는 아직도 기록지에 시선을 향한 채로 몸만 끌려왔다·
“···?”
퉁명스레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그는 스칼렛과 촌장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담당자가 버둥대면서 답했다·
“아···· 아아아아아! 촌장님! 잔불의 기사님과 함께 오셨군요! 아 어쩐지! 이 엄청난 기운이 느껴지더라니~!”
“됐고 어떻게 된 일인지나 설명하게나·”
“아 예! 잔불의 기사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당연히 해두었습니다· 대표들도 이제 막 도착해서 아직 정신이 없었을 뿐이고····”
생뚱맞은 답변만을 내놓고 있다·
스칼렛도 촌장도 전혀 납득하지 못했고 결국 스칼렛이 직접 나서서 물었다·
“무엇에 정신이 팔려있는건가· 다들·”
“하하하하~!”
담당자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웃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미소였다·
“정말로 별 거 아니라서 잔불의 기사님께서 신경 쓰실만한 것도 아닙니다! 예!”
스칼렛이 노골적으로 표정을 구겼다·
“허면 별것도 아닌 것 때문에 나를 이리 취급했다는 말이냐····”
“아니···· 아니···! 그것이 아니고···!”
담당자는 몸과 말 전부를 흐물거렸다· 툭 치면 통째로 무너져내릴 듯 했다·
스칼렛은 결국 그를 밀치고 기록지를 향해 다가갔다· 담당자가 어쩔 줄을 몰라했다·
“기사님! 자 잠시만! 그러지 마시고···!”
“달라붙지 마라·”
기사가 담당자를 거칠게 밀쳐냈다·
“점수 좀 봐·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 정도면···· 천축이라도 위험한 거 아니야?”
여전히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 사이를 스칼렛은 하나둘 제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기록지 앞에 섰다·
“····”
“····”
자신과 같은 성을 지닌 빌어먹을 마법사의 얼굴· 기록지에는 고작 그게 담겨있었다·
마법 학부 대표들이 전투를 펼쳐나간다·
유령들은 먼지처럼 쓸려나가고 마법이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모습· 여기있는 전부가 그것에 시선을 빼앗긴 채였다·
“고작 이따위 것 때문에····”
스칼렛은 벽에 붙어있는 기록지를 손으로 움켜쥐어 뜯었다·
주변 사람들은 화를 내려다 뜯은 이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숨을 삼켰다·
“기 기사님?”
“잔불의 기사님?”
스칼렛의 불타는 눈동자는 여전히 기록지에 꽂혀있다·
136 137 138····
“····”
악명 높은 유령들을 처치해 나가는 마법사들·
계속해서 올라가는 점수·
광장은 어느덧 조용해졌고 스칼렛은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토벌제 시작까지 30분도 안 남은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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